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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인문

"번역자란 그에게 늘 붙어 다니던 배신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패배를 각오한 순직자"

by JeanJac 2023. 2. 19.

한국어와 프랑스어 사이의 문학 번역의 경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이걸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놀라울따름이다. 이어령이 말한 것처럼, 그건 '순직'에 가까운듯하다. 

“그리스말과 독일말 사이에서, 고대와 근대 사이에서 또한 그리스와 서양의 사이에서, 시와 철학의 사이, 생과 죽음의 사이 그 틈 사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방황한 힐더린의 번역행위에서 순수의 언어로 접근하려던 벤야민이 꿈꾸던 황당무계한 번역론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의 운명과 그 최종의 목적지 는번역하고남은부분에있으며그것이침묵하고있는이나라말과저나라땅위에존재한다는역설을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번역자란(transrator) 그에게 늘 붙어 다니던 배신자(trator)가 아니라 처음부터 패배를 각오한 순직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이어령, 비포 바벨의 번역론, p. 23, in 한국문학번역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제6회 세계번역가대회,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학번역원, 2014, 한국문학번역원 사이트 : 
https://ltikorea.or.kr/upload/dataevent/20191203175133311241.pdf (2023/02/18 확인).

 

심지어 산드린 추푸의 다음 지적이 타당하기도 하다. 

"산드린 추푸: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번역 아카데미 수업에 참여하면서 감수자가 한국어를 모르는 편이 더 낫겠다고 느꼈습니다. 감수자 번역물을 감수할 때 만약 언어를 알면, 한국어로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있으니 그러면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언어를 모를 때는 모든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착어를 모르는 감수자는 그 의미를 매번 확인합니다. 출발어를 아는 감수자들이 번역한 텍스트는 한국어 텍스트 같다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최미경, 분과토의: 불어권, p. 182, in ibid.
(Sandrine Tchoupou : Pendant les classes de l'académie à l'Institut de la traduction littéraire, le réviseur qui ne connaissait pas le coréen semblait jouir d’avantages. Quand on connaît la langue, il y a des passages qu'on a compris en coréen et on passe, mais quand on ne connaît pas la langue, tout doit être clair en traduction. Le réviseur qui ne connaît pas la langue exige de vérifier le sens. Pour ceux qui connaissent la langue de départ, le texte traduit reste souvent un peu coréen. Choi, Mikyung, Table ronde : section française, 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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