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

NotebookLM으로 번역하며 읽기의 예 : 미셸 푸코의 « 다른 공간들 »

by JeanJac 2025. 12. 23.

나는 한국에 살고 있지 않아서, 한국 책을 접하기 쉽지 않다. 내가 사는 곳에 있는 책들을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그리고 중요한 책들은 가능하면 스캔해서 PDF로 만들어둔다. 

 

미셸 푸코의 다른 공간들을 예로들어 NotebookLM의 사용 과정을 살펴본다.  

 

이 텍스트는 검색하면 프랑스어로도 또 영어로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정확한 참고 정보가 필요해서 스캔을 해두었었다. 

 

다음과같이, 가능하면 파일명에 참고문헌에 적을 정보를 표기해둔다. 컴퓨터 폴더에 저장해둘 때에도 찾기가 휩다. 

 

Foucault, Michel, « Qu'est-ce qu'un auteur ? », in Dits et écrits I, Paris, Gallimard, 1994, p. 817-849.pdf

 

PDF로 스캔하거나 다운로드 받은 파일들은 구글 드라이브에도 저장해둔다. 그리고 저장해둔 파일을 NotebookLM에 불러온다. 이 과정은 이전 글에 정리해두었다. 

 

2025.12.17 - [정보] - NotebookLM으로 인공지능 디지털 도서관 만들기

 

NotebookLM으로 인공지능 디지털 도서관 만들기

내게 중요한 책들은 PDF형태로 구글드라이브에 보관한다. 그렇게 모인 PDF의 양이 많기 때문에, 찾기 쉽게 이름을 잘 적어 넣어준다. 앞에 소개했던 마르크 지므네즈 예를 들어보자. 마르크 지므

a4riz.tistory.com

 

NotebookLM으로 텍스트를 불러오는 과정에서 또 한가지 또 좋은 점은 스캔한 텍스트를 완전한 디지털 형식으로 인식해낸다는 점이다. 

 

 

Foucault, Michel, « Qu'est-ce qu'un auteur ? », in Dits et écrits I , Paris, Gallimard, 1994, pp. 752-753.

 

위와같은 형태로 스캔한 텍스트 PDF파일을 Notebook불러온면 다음같이 텍스트 전체를 복사, 붙여넣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한다. 

 

NotebookLM 화면

 

왼쪽 부분에 테스트 전문이 들어가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서 이 텍스트에 대한 내용을 원하는 언어로 대화 나눌 수 있고, 번역도 시킬 수 있다. 전부 번역해보라고 했더니 분량이 많다고, 핵심만 짚어주겠다며 다음과같이 정리했다. 


다른 공간들 (Des espaces autres) -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 공간의 시대 (L'époque de l'espace) 오늘날의 시대는 아마도 공간의 시대일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성의 시대, 병치의 시대, 가까운 것과 먼 것, 옆에 있는 것, 분산된 것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3. 19세기가 시간과 역사의 흐름에 집착했다면, 현재는 세계를 시간이 흐르며 발전하는 거대한 삶이라기보다는 점들을 연결하고 교차시키는 네트워크로 인식합니다3.
2.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 (Utopies et Hétérotopies) 우리가 사는 공간은 균질하거나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공간입니다4. 이 중에서도 다른 모든 공간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관계를 중단시키거나 중화시키거나 반전시키는 특수한 공간들이 있습니다5.
유토피아 (Utopies): 실제 장소가 없는 곳입니다. 이들은 사회와 직접적 혹은 역설적인 유비 관계를 맺으며, 사회가 완벽해진 형태이거나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지만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입니다6.
헤테로토피아 (Hétérotopies):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며, 사회 제도 속에 그려진 일종의 '반(反)-공간(contre-emplacements)'입니다. 이곳은 문명 내의 다른 모든 실제 장소들이 재현되고, 반박되고, 전복되는 곳입니다6.
3. 거울의 경험 (L'expérience du miroir) 거울은 유토피아인 동시에 헤테로토피아입니다. 거울은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보게 하므로 유토피아(장소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거울은 실제로 존재하며 내가 있는 곳에 대해 되먹임 효과를 가지므로 헤테로토피아입니다7.
4. 헤테로토피아의 6가지 원칙 (Les six principes de l'hétérotopologie)
첫 번째 원칙: 위기와 일탈 (Crise et Déviation) 전 세계의 어떤 문화도 헤테로토피아를 구성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8.
원시 사회에는 **'위기의 헤테로토피아'**가 있습니다(예: 청소년, 생리 중인 여성 등을 위한 금기된 장소)9.
현대 사회에서 이는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행동이 규범에서 벗어난 개인들을 두는 곳으로, 요양원, 정신병원, 그리고 감옥이 이에 해당합니다10.
두 번째 원칙: 기능의 변화 (Changement de fonction) 사회는 역사 속에서 기존 헤테로토피아의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묘지(Cimetière)**가 그 예입니다. 과거 묘지는 도시의 중심, 교회 옆에 위치했으나, 19세기 이후 죽음이 '질병'으로 간주되면서 도시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제 묘지는 각 가족이 '검은 집'을 소유하는 '다른 도시'가 되었습니다1112.
세 번째 원칙: 공간의 병치 (Juxtaposition) 헤테로토피아는 양립할 수 없는 여러 공간을 하나의 실제 장소에 겹쳐 놓을 수 있습니다13.
극장의 무대, 3차원 공간을 2차원 스크린에 투사하는 영화관이 그 예입니다. 가장 오래된 예시는 **정원(Jardin)**입니다. 동양의 정원은 세계의 축소판(microcosme)이자 세상 전체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1314.
네 번째 원칙: 시간과의 관계 (Hétérochronies) 헤테로토피아는 시간의 분절, 즉 '헤테로크로니(hétérochronie)'와 연결됩니다15.
시간이 무한히 축적되는 헤테로토피아: 박물관과 도서관 (모든 시대와 형태를 한 장소에 모으려는 근대의 의지)16.
시간이 가장 덧없고 일시적인 축제의 헤테로토피아: 시장(Foires)이나 휴가촌(Villages de vacances)17.
다섯 번째 원칙: 열림과 닫힘의 체계 (Ouverture et Fermeture) 헤테로토피아는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입을 위해서는 의례나 정화가 필요하거나 강제로 수용되어야 합니다(감옥, 병영)18.
예를 들어, 미국의 모텔은 불법적인 성행위가 숨겨지면서도 보호받는 공간으로서, 들어가는 자는 사실상 외부와 차단되는 구조를 가집니다1920.
여섯 번째 원칙: 환상과 보상 (Illusion et Compensation) 헤테로토피아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합니다20.
환상의 공간: 현실 공간이 더 환상적임을 폭로하는 공간 (예: 사창가)20.
보상의 공간: 현실이 무질서한 것과 달리, 완벽하고 치밀하게 정돈된 공간 (예: 식민지)20. 17세기 청교도 사회나 남미의 예수회 식민지는 인간의 삶이 완벽하게 규율된 실제적인 헤테로토피아였습니다21.
5. 결론: 배 (Le Navire) 배는 장소가 없는 장소(lieu sans lieu)이자, 스스로 폐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바다의 무한함에 몸을 맡기는 떠다니는 공간입니다22. 배는 항구에서 항구로, 사창가에서 사창가로 이동하며 식민지의 보물을 찾아다닙니다. 따라서 배는 우리 문명에서 경제적 발전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최대 저장고입니다. 배는 **헤테로토피아의 전형(l'hétérotopie par excellence)**입니다22.
--------------------------------------------------------------------------------
참고 (Note): 이 텍스트는 미셸 푸코가 1967년 건축 연구 모임에서 행한 강연 원고로, 1984년에야 출판이 허가되었습니다323. 앞부분에는 로제 노벨스피스(Roger Knobelspiess)의 책 서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감옥 내 '고보안 구역(Q.H.S.)'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대한 푸코의 비평을 다루고 있습니다
 
(문장 뒤의 숫자는 주석이며, 관련 내용의 위치를 알려준다.)

 

텍스트 전문을 번역하길 원한다면 조금씩 부탁하면 된다. 

 

: 텍스트 앞의 한 페이지만 한국어 번역

 

NoteookLM:

제시된 자료(Source1,2)에 근거하여, 미셸 푸코의 텍스트 **『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의 첫 페이지(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 드립니다.
--------------------------------------------------------------------------------
다른 공간들 (강연)1
(편집자 주: 미셸 푸코는 1967년 튀니지에서 작성된 이 텍스트의 출판을 1984년 봄이 되어서야 허가했다.)2
"19세기를 사로잡았던 거대한 강박은, 우리가 알다시피, 역사였습니다. 발전과 정지라는 주제, 위기와 순환이라는 주제, 과거의 축적, 죽은 자들의 과도한 포화, 세계를 위협하는 냉각과 같은 주제들이 그것입니다. 19세기가 그 신화적 자원의 핵심을 발견한 곳은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는 아마도 '공간의 시대'일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성(simultané)의 시대, 병치(juxtaposition)의 시대, 가까운 것과 먼 것, 옆에 있는 것, 분산된 것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가 시간을 통해 발전하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점들을 연결하고 그 타래를 교차시키는 네트워크로서 경험되는 순간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데올로기적 갈등 중 일부는 '시간의 경건한 후손들'과 '공간의 맹렬한 거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2
구조주의, 혹은 적어도 그 다소 일반적인 이름 아래 묶이는 것은, 시간을 통해 분포되었을 수 있는 요소들 사이에 일련의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입니다. 이 관계들은 요소들을 병치되고, 대립되고, 서로 함축하는 것으로, 요컨대 일종의 배치(configuration)로서 드러나게 합니다. 사실 이것은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 그리고 역사라고 부르는 것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입니다."

 


: 이어지는 텍스트 한 페이지 한국어로 번역

 

NotebookLM:

제시된 자료(Source)에 근거하여, 지난 답변에 이어지는 텍스트(원문 PDF의 753페이지에 해당)를 한국어로 번역해 드립니다.
이 부분에서 푸코는 '중세의 위치화(localisation) 공간', '갈릴레오의 연장(étendue) 공간', 그리고 '현대의 배치(emplacement) 공간'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역사를 서술합니다.
--------------------------------------------------------------------------------
[이어지는 번역: 공간의 역사와 배치의 시대]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 이론, 그리고 시스템의 지평에 나타나는 공간이 새로운 혁신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서구의 경험 속에서 공간 자체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이 숙명적인 교차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공간의 역사를 아주 거칠게 추적해 보자면, 중세의 공간은 위계화된 장소들의 집합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장소와 세속적인 장소, 보호받는 장소와 반대로 개방되어 무방비한 장소, 도시의 장소와 시골의 장소(이것은 인간의 실제 삶에 대한 것입니다)가 있었습니다. 우주론적 이론에 따르면, 천계(celestial)의 장소와 대립하는 초천계(supra-celestial)의 장소가 있었고, 천계의 장소는 다시 지상의 장소와 대립했습니다. 또한 사물들이 폭력적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에 놓여 있는 장소가 있었고, 반대로 사물들이 자연적인 위치와 휴식을 찾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주 거칠게 '중세적 공간', 즉 위치화(localisation)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구성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장소들의 위계, 대립, 그리고 교차였습니다1.
이 위치화의 공간은 갈릴레오와 함께 열렸습니다. 갈릴레오 연구의 진정한 스캔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혹은 재발견)한 것이라기보다는, 무한하고 무한히 열린 공간을 구성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중세의 장소는 그 안에서 어느 정도 해체되었고, 사물의 장소는 운동 속의 한 점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사물의 정지 또한 무한히 느려진 운동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갈릴레오 이후, 17세기부터는 **'연장(l'étendue)'**이 '위치화(la localisation)'를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2.
오늘날에는, 위치화를 대체했던 연장을 대신하여 **'배치(l'emplacement)'**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배치는 점들이나 요소들 간의 인접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형식적으로 우리는 이것들을 수열(séries), 트리(arbres), 격자(treillis)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현대 기술에서 배치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기계의 기억 장치 속에 정보나 계산의 부분적 결과를 저장하는 것, 무작위로 출력되는 이산적 요소들의 순환(자동차나 전화선의 소리처럼), 무작위로 분포되었거나 일의적 혹은 다의적 분류에 따라 분류된 집합 내부에서 표시되거나 코드화된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3.
더욱 구체적으로, 자리나 배치의 문제는 인구 통계학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제기됩니다. 이 인간 배치의 문제는 단순히 세상에 인간을 위한 공간이 충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물론 이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만)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인접 관계, 어떤 유형의 저장, 순환, 식별, 인간 요소의 분류가 우선적으로 채택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공간이 배치의 관계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4.
어쨌든, 저는 오늘날의 불안이 근본적으로 시간보다는 공간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은 아마도 공간 속에 분포된 요소들 사이의 가능한 분배 게임 중 하나로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을 점유하는 모든 기술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결정하거나 형식화할 수 있게 해주는 지식의 네트워크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공간은 아마도 19세기에 탈신성화된 시간과는 달리 아직 완전히 탈신성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공간에 대한 이론적인 탈신성화(갈릴레오의 작업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는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실천적인 공간의 탈신성화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우리가 감히 손대지 못하는, 제도와 실천이 아직 감히 침범하지 못한 일련의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립들, 예를 들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가족의 공간과 사회적 공간, 문화적 공간과 유용한 공간, 여가 공간과 노동 공간 사이의 대립들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은밀한 신성화(sacralisation)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5."

 


 

ChatGPT 번역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다른 공간들> (건축학 연구 서클 강연, 1967년 3월 14일), Archi lecture, Mouvement, Continuité, nº 5, 1984년 10월, 46-49쪽
"미셸 푸코는 1967년 튀니지에서 작성한 이 글의 출판을 1984년 봄이 되어서야 허락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19세기를 집요하게 괴롭힌 큰 공포는 역사였다. 발전과 정체, 위기와 순환, 과거의 축적, 죽은 자의 과다, 세계의 위협적 냉각이라는 주제들이 그것이다. 19세기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자신들의 신화적 자원의 핵심을 발견했다. 현재의 시대는 오히려 공간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시성의 시대, 병렬적 배열의 시대, 가까움과 멀음, 나란함, 분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세계가 이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점들을 연결하고 그 실타래를 엮는 네트워크로 경험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오늘날 논쟁을 부추기는 몇몇 이념적 갈등은 시간의 경건한 후손들과 공간에 집착하는 거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 혹은 적어도 이 이름 아래 약간 일반적으로 묶이는 것들은, 시간 속에 흩어져 있을 수 있는 요소들 사이에 관계의 집합을 확립하려는 시도다. 이를 통해 요소들은 나란히 놓이거나, 서로 대립하거나, 상호 함축된 것으로 나타나며, 결국 일종의 구성(configuration)으로 드러난다. 사실 이것은 시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과 ‘역사’라 부르는 것을 처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관심, 이론, 체계의 지평에 나타나는 공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간의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구적 경험 속에서 공간 자체도 역사성을 지니며, 시간과 공간이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공간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본다면, 중세에는 공간이 계층화된 장소들의 집합으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신성한 장소와 세속적 장소, 보호된 장소와 반대로 개방적이고 방어되지 않은 장소, 도시적 장소와 시골 장소(이는 인간의 실제 삶을 위한 것이었다)로 나뉘었다.

우주론적 이론에서는 초천상적 장소가 천상적 장소와 대립했으며, 천상적 장소는 다시 지상적 장소와 대립했다. 또한 사물이 폭력적으로 이동되어 배치된 장소가 있었고, 반대로 사물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쉴 수 있는 장소도 존재했다. 이러한 모든 계층, 대립, 장소들의 얽힘이 바로 대략적으로 ‘중세적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즉, 위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위치의 공간은 갈릴레오 시대에 열리게 된다. 갈릴레오 작품의 진정한 충격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나 재발견한 것보다, 무한하고 무한히 열린 공간을 구축했다는 데 있다. 중세적 장소는 일종의 해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사물의 장소는 이제 움직임 속의 한 점에 불과해졌고, 사물이 쉴 수 있는 상태 역시 단지 무한히 느려진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갈릴레오 이후, 17세기 이후로는 위치(localisation)에 대신하여 공간(extensité)이 자리 잡게 된다.

오늘날에는 공간(extensité)에 대신하여 위치(emplacement)가 등장한다. 이 위치는 점이나 요소 간의 인접 관계로 정의된다. 형식적으로는 일련, 나무 구조, 격자 구조 등으로 묘사할 수 있다.

한편, 현대 기술에서 위치 문제의 중요성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기계의 메모리에 정보나 계산의 중간 결과를 저장하거나, 임의 출력(discrete output)되는 요소들의 순환(예: 자동차, 혹은 전화선 상의 음성)과, 전체 집합 내에서 표시되거나 코드화된 요소들을 탐지하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집합은 무작위로 분포될 수도, 단일 기준으로 분류될 수도, 혹은 다중 기준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소(place)나 위치(emplacement)의 문제는 인간에게 인구학적 차원에서 제기된다. 인간 위치 문제는 단순히 세상에 인간이 들어갈 충분한 공간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다—물론 이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더 나아가, 특정 상황에서 어떤 인접 관계, 어떤 저장 방식, 어떤 순환 방식, 어떤 요소 탐지나 분류 방식이 우선적으로 채택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간이 **위치 관계(relations d’emplacement)**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쨌든 나는 오늘날의 근본적 불안이 시간보다는 공간과 훨씬 더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아마도 공간 속에서 요소들이 배치될 수 있는 여러 분배 방식 중 하나로서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든 기술이 동원되고, 그것을 규정하거나 형식화할 수 있는 지식 네트워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공간은 아직 완전히 신성성에서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19세기에 이미 신성성에서 벗어난 시간과는 달리 말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공간의 신성성이 어느 정도 해체된 바는 있다(갈릴레오의 업적이 신호탄이 되었던). 그러나 우리는 아직 공간의 실천적 신성성 해체에는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의 삶은 여전히 건드릴 수 없는 여러 대립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제도와 실천이 아직 감히 건드리지 못한 이러한 대립 구조—예를 들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가족 공간과 사회적 공간, 문화적 공간과 실용적 공간, 여가 공간과 노동 공간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은밀한 신성화로 작동하고 있다."

 


내용뿐만이 아니라 번역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각각의 대규모언어모델들과 논의가 가능하다. 세세한 부분에 대한 내용은 여기에 더 적지 않겠다.

 

위의 예는 이제 디지털 텍스트는 다중언어 텍스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같은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 각각이 직접 번역자가 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실현하게 해주는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해당 언어를 공부해야하고, 텍스트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한다는 사실이 이 상황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인공지능이 다 번역해주니 다른 언어를 공부할 필요가없고, 번역가가 필요없고 등등의 생각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번역가는 이미 그 일에 대해  (한국) 사회가 제대로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인정해주지 않아서 비자발적이든 자발적이든 사라지게 되는 상황일테고, 다른 언어 공부는 그냥 귀찮아서 안하는데 이제 핑계거리가 좋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많은 언어들이 그렇겠지만, 위와같은 상황에 처한 한국어의 경우는 더 빠르게 그 사용과 변화를 AI가 주도하게 될 것이라 짐작해본다. 

 


NotebookLM이 생성한 영상은 Wind Art Mind 유튜브 채널에 올려두었다. 

 

https://youtu.be/qzSRBi_KRiw?si=LWX231rNRTuKSicU

Wind Art Mind 유튜브

 

NotebookLM이 한국어로 생성한 영상은 특히나 과장된 추임새와 표현이 많다. 이게 언제쯤 나아지려나? 아무튼 직접 텍스트와 대화를 한다면 이런 영상은 그냥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본다는 의미로 한번 스쳐 보고 지나가면 되겠다. 혹은 직접 만들어서 보면 된다. 이렇게 NotebookLM에 직접 텍스트를 다중언어 대화 가능 텍스트로 불러오면, 다른 2차, 3차 설명들, 특히 유튜브 영상들을 찾을 필요성이 거의 없어지게 된다. 

 

잘 짜여진 텍스트를 선택하고 곁에 두고 대화하는, 직접적인 독서 경험의 가치가 보다 잘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