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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글뤽스만의 '덧없음(에페메르)의 미학'의 한구절

by JeanJac 2026. 2. 3.

"에페메르(éphémère : 하루살이, 덧없음, 일시적임)는 사물, 존재, 실존의 간격과 지각할 수 없는 흐름 속의 시간을 잡는다. '사이'에 있는, 현재의 현존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니까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주시하는 실존과 정치의 전략을 의미한다. 다원적인 모습과 가시성을 점점더 세상의 인과관계와 무관한(acosmique) 공공 공간의 조건으로 삼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의미한, 미학이자 정치학이다." 크리스틴 뷔시 글뤽스만, 에페메르의 미학, 파리, 갈릴레, 2003, 25-26쪽. (JeanJac의 번역)

 

2023년 6월 13일에 블로그에 메모해둔 글인데, 2026년 2월 2일 오늘, 그 의미가 세롭게 와 닿는다. 당시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나비의 날개가 부벼짐에 시공간이 진동하여 여기저기서 시간이 창발하는 모습을 상상한다"라고 적어두었다. 

 

2023.06.13 - [음악] - 슈만의 나비와 리게티의 글리산디

 

슈만의 나비와 리게티의 글리산디

크리스틴 뷔시 글뤽스만(Christine Buci-Glucksmann)의 에페메르의 미학을 읽다가 슈만의 나비와 리게티의 글리산디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옮겨적고 번역해둔다. "에페메르(éphémère : 하루살이, 덧없음

a4riz.tistory.com

 

의미를 계속 되새기게되는 구절이다. 저자가 적은 언어로 다시 읽는다. 

 

« L'éphémère capte du temps dans les flux imperceptibles et les intervalles des choses, des êtres et de l'existant. Tout ce qui est « entre » et peut échapper à la présence du présent. Il implique donc une stratégie existentielle ou politique attentive à l'imprévisible. Une esthétique, donc, mais aussi une politique, au sens d'Hannah Arendt, qui a fait des apparences et d'une visibilité plurielle les conditions mêmes d'un espace public de plus en plus acosmique. » Christine Buci-Glucksmann, Esthétique de l'éphémère, Paris, Galilée, 2003, pp. 25-26. 

 

2023년에는 한국어와 프랑스어 번역을 제대로 해내는 도구가 없었다. 지금은 어떨까 궁금하다. 

 

"덧없음(에페메랄)은 감지하기 어려운 흐름과 사물·존재·존재함 자체의 간극 속에서 시간을 포착한다. 즉 ‘사이(between)’에 놓여 있으며, 현재의 현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실존적 혹은 정치적 전략을 함의한다. 이는 하나의 미학이지만, 동시에 정치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의미에서의 정치, 곧 외양과 다원적 가시성을 점점 더 비-세계적인 공적 공간의 성립 조건으로 사유한 정치 말이다." 크리스틴 부시-글뤽스만, 『덧없음의 미학』, 갈릴레, 2003, 25–26쪽. (ChatGPT의 번역)

 

"덧없음(L'éphémère)은 사물과 존재, 그리고 실존하는 것들의 감지할 수 없는 흐름과 그 간극 속에서 시간을 포착한다. 그것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자, 현재라는 현전(presence)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덧없음은 예측 불가능한 것에 주목하는 실존적 혹은 정치적 전략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의 미학인 동시에, 현상(apparences)과 복수적 가시성을 점점 더 비세계적(acosmique)으로 변해가는 공공 영역의 근본 조건으로 삼았던 한나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정치이기도 하다." 크리스틴 뷔시-글뤼크스만, 『덧없음의 미학』, 파리, 갈릴레 출판사, 2003, 25-26쪽. (Gemini의 번역)

 


 

그리고 다음의 구절을 이어서 적어놓았다. 

 

"따라서 에페메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시간의 단절'과같은 단 한 순간의 에페메르와, 그리고 오로지 경험했던 현재라는 에페메르와도 구분되어야한다. 에페메르는 시간을 맞이하고, 수용하고, 예측할 수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의 예술이다. 에페메르는 단지 그것이 연루된 현재의 헤도니스트의 쾌락보다는 일본의 마(공, 간격, 간격두기) 문화의 간격 추구에 가깝다. 왜냐하면 모든 지나감은 덧없고 불안정하고, '만남'으로서의 계기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을 가로지르고 시간에 리듬과 뾰족함과 농도와 요동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리게티의 글리산디의 소리의 정지와 울림 혹은 슈만의 나비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음악가의 혜안이다. 에페메르는 시간이 아니라 민감해진 시간의 울림이다." 크리스틴 뷔시 글뤽스만, 에페메르의 미학, 파리, 갈릴레, 2003, 26쪽. (JeanJac의 번역) 

 

« Il convient donc de différencier l'éphémère du seul instant comme "coupure du temps" au sens aristotélicien, mais aussi du seul présent vécu. L'éphémère est un art du temps, qui consiste à l'accueillir, à céder au temps (tempri cedere), et à l'accepter tel qu'il est, fût-il imprévisible. Il est beaucoup plus proche de la quête de l'intervalle propre à la culture japonaise du Ma (espacement, intervalle, vide) que de la seule jouissance hédoniste du présent qu'il implique. Car tout passage est fugutif et fragile, et rentrer au cœur de l'occasion comme "rencontre" implique de traverser le temps, de lui donner son rythme, ses aiguillons, ses intensités et ses intranquilités. Une sagesse toute musicale en somme, qui me fait penser aux Papillons d'un Schumann, ou aux vibrations et suspensions sonores des Glissandi de Ligeti. L'éphémère n'est pas le temps mais sa vibration devenue sensible. », Ibid., p. 26

 

2026년의 대규모 언어모델들은 깨진 항아리를 그럴듯하게 잘 맞추어 놓는다. 

 

"따라서 덧없음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시간의 절단’으로서의 단일한 순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단순히 체험된 현재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덧없음이란 시간을 맞이하고,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며(tempori cedere), 설령 그것이 예측 불가능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하나의 시간의 예술이다. 그것은 자신이 함의하는 현재의 쾌락적 향유보다는, 일본 문화에서 말하는 마(Ma) — 간격, 사이, 여백, 공(空) — 의 탐구에 훨씬 더 가깝다. 왜냐하면 모든 이행은 덧없고 연약하며, ‘만남’으로서의 기회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시간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그 시간에 고유한 리듬과 가시, 강도와 불안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는 전적으로 음악적인 지혜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여기서 슈만의 「나비」를, 또 리게티의 글리산도에서 들리는 진동과 음향적 정지를 떠올리게 된다. 덧없음은 시간이 아니라, 감각 가능해진 시간의 진동이다." 크리스틴 부시-글뤽스만, 『덧없음의 미학』, 갈릴레, 2003, 26쪽. (ChatGPT의 번역)

 

"따라서 덧없음(l'éphémère)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시간의 절단'으로서의 단순한 찰나(instant)와 구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단지 살아있는 현재와도 구별해야 한다. 덧없음은 시간을 환대하고, 시간에 순응하며(tempri cedere), 그것이 설령 예측 불가능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의 기술(art du temps)이다. 그것은 덧없음이 수반하는 현재의 향락적인 즐거움보다는, 일본 문화 특유의 '마(Ma, 間, 간격, 여백)'가 추구하는 간격의 탐구에 훨씬 더 가깝다. 모든 이행(passage)은 일시적이고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남'으로서의 '기회(occasion)'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을 가로지르는 것, 즉 시간에 리듬과 자극, 강도와 불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는 전적으로 음악적인 지혜이며, 슈만의 <나비(Papillons)>나 리게티의 <글리산디(Glissandi)>가 보여주는 소리의 진동과 부유(suspension)를 떠올리게 한다. 덧없음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가능해진 시간의 진동이다." 크리스틴 뷔시-글뤼크스만, 『덧없음의 미학』, 파리, 갈릴레 출판사, 2003, 26쪽. (Gemini의 번역)

 


2023년에 날개를 펄럭이던 나비는 이제 떠오르지 않는다. 

 

간격을 읽는 행위가 덧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있다.

 

덧없음이 덧없어진다.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게 아니라 언어의 다리를 허물고 있으니까.

 

미래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덧없음의 감각과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시간은 더이상 울리지 않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덧없음(에페메르)을 감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몽파르나스 묘지, 2026.
몽파르나스 묘지,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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