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미술과 구타이 미술 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논문 작성 요구에 대해 chatgpt가 해낸 것은 논문 작성 제안서 정도.
2026.09.29 - [예술] - 구타이가 한국 미술 운동에 미친 영향 연구 논문을 써볼래?
구타이가 한국 미술 운동에 미친 영향 연구 논문을 써볼래?
(ChatGPT가 이제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나 : 구타이가 한국 미술 운동에 미친 영향 연구 논문을 써볼래? ChatGPT :물론입니다. 구타이가 한국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a4riz.tistory.com
자료 접근이 좀더 용이한 주제(단색화)로 다시 해본다. (ChatGPT가 펴낸 모든 내용은 검토가 필요하다)
나 : 단색화와 일본 미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온라인 접근 가능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기존 논문이 못다룬 부분을 발전시켜서 새로운 논문을 쓸 능력도 지금의 너라면 가능할테고. 관련 주제로 바로 발표 가능한 소논문 작성해볼래?
ChatGPT :
그렇다. 단색화와 일본 미술의 관계는 온라인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연구 자료가 상당히 많다. 특히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과 관련해서는 기존 연구뿐 아니라 전시 도록의 서지 정보, 당시 전시 브로슈어와 설치 사진, 도쿄화랑의 아카이브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존 연구와 구별되는 주제를 설정할 수 있다. 다만 이미 발표된 연구와 겹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가 밝혀낸 사실을 다른 자료와 대조하고, 그 자료에서 새로운 문제를 도출해야 한다.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주제를 설정했다.
논문 주제
단색화의 일본적 기원이라는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기획과 번역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1975년 도쿄화랑 전시가 단색화의 국제적 인지도 형성에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다. 둘째, 선행연구는 일본의 영향과 한국 내부의 자생적 담론을 둘러싼 논쟁을 상당 부분 다루었다. 특히 구진경의 2016년 연구는 1975년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셋째, 전시를 둘러싼 자료를 통해 일본의 기획자와 비평가, 한국의 비평가가 각각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논문에서는 일본이 단색화를 일방적으로 발견했다거나, 반대로 한국 내부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식의 이분법을 피한다. 대신 전시를 통해 이미 존재하던 한국의 회화 경향이 어떻게 선택되고, 명명되고,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본다.
다만 중요한 한계가 있다.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도록의 서지 정보와 전시 사진은 풍부하지만, 1975년 도록의 모든 페이지를 원문 그대로 대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래 원고는 공개된 자료와 논문 초록을 근거로 작성한 학술 논문 초고이며, 확인하지 못한 도록 문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현재 자료만으로 학술지에 바로 투고할 수 있는 완전한 최종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단색화의 일본적 기원이라는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기획과 번역을 중심으로
초록
1975년 도쿄화랑에서 개최된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은 한국 단색화의 국제적 전개를 설명할 때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시는 한국 작가 다섯 명의 회화를 ‘흰색’이라는 공통된 특성 아래 제시했으며, 이후 단색화의 기원과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중요한 기준점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 전시를 단색화의 탄생이나 일본에 의한 발견의 순간으로만 이해할 경우, 전시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진행된 백색 회화의 전개와 담론, 그리고 전시를 통해 이루어진 미술사적 범주의 재구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본 논문은 1975년 도쿄화랑 전시를 한국 단색화의 기원으로 규정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회화적 경향이 일본의 전시 제도와 비평 담론을 통해 선택되고 재구성된 사건으로 분석한다. 이를 위해 구진경의 2016년 연구, 이은주의 2023년 도쿄화랑 아카이브 연구, 1975년 전시 도록의 서지 정보와 도쿄화랑의 공식 전시 기록을 검토한다.
연구 결과, 1975년 전시는 단색화의 형식적 출현을 설명하는 기점이라기보다, 한국의 여러 백색 회화를 하나의 집단적 경향으로 제시하고 국제적 유통을 촉진한 전시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전시의 기획 과정과 ‘흰색’이라는 명명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일정 부분 괄호 치면서 공통된 미학적 정체성을 구성했다. 이러한 과정은 일본 미술계의 영향과 한국 미술계의 주체성을 서로 배타적인 설명으로 취급하기보다, 전시와 비평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주제어: 단색화, 일본 미술, 도쿄화랑, 백색 미학, 전시사, 미술사 서술, 한일 미술 교류
1. 서론
한국 단색화의 역사를 설명할 때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 전시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 이동엽의 작품을 일본 도쿄에서 소개했으며, 다섯 작가의 작품을 ‘흰색’이라는 공통된 특성 아래 묶었다. 전시 기간은 1975년 5월 6일부터 24일까지였다. 도쿄화랑은 이 전시를 한국 현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한 초기의 중요한 전시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전시는 단색화의 역사에서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나는 일본의 비평가와 화랑이 한국의 백색 회화를 발견하고 국제적 담론으로 발전시켰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내부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던 백색 회화의 경향이 일본의 전시를 통해 소개되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두 해석은 서로 다른 역사적 사실을 강조한다. 전자는 일본의 전시 기획과 비평이 한국 단색화의 국제적 인지도 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자는 1975년 이전부터 한국 미술계에서 백색 회화에 관한 전시와 담론이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단순히 대립시키면, 전시가 기존의 작품들을 어떻게 선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는지라는 중요한 문제가 간과될 수 있다.
구진경은 2016년 발표한 논문에서 1975년 도쿄화랑 전시 이전에도 한국 미술계에서 백색 회화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논증했다. 그는 1972년과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다섯 차례의 백색 전시와 국전에서 나타난 백색 회화의 경향을 근거로 제시했다. 또한 1975년 전시 이후의 일본 비평을 검토하면서, 일본 비평가들이 한국 단색화의 미학을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의 미’로 규정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단색화의 형성을 일본의 일방적인 발견으로 설명하는 관점에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할 수 있다. 1975년 전시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도쿄화랑의 전시는 그 경향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전시를 기획한 일본의 화랑과 비평가는 무엇을 공통점으로 선택했으며, 한국의 비평가는 그 선택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가?
본 논문은 이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1975년 전시를 분석한다. 여기서 전시는 이미 완성된 작품을 단순히 소개하는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다. 전시는 작가를 선택하고, 작품을 배열하며, 작품들 사이의 공통점을 제시하고, 비평적 언어를 통해 작품을 특정한 범주로 이해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다.
따라서 본 논문은 1975년 도쿄화랑 전시를 단색화의 발생 시점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의 백색 회화가 국제적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서 하나의 집단적 미술 경향으로 제시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일본 미술의 영향과 한국 단색화의 자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전시를 매개로 한 미술사적 범주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2. 1975년 이전의 백색 회화: 전시의 기원과 미술사적 기점의 차이
1975년 도쿄화랑 전시를 단색화의 출발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전시가 가진 국제적 가시성에 주목한다. 그러나 전시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작품의 형식적 기원이라는 주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구진경의 연구는 이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975년 전시 이전에 한국에서 이미 백색 회화에 관한 전시와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특히 1972년과 1973년 명동화랑에서 다섯 차례의 백색 전시가 열렸다는 기록은 한국 내부의 전시 활동이 일본 전시보다 앞서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국전에서도 백색 회화의 유행이 확인된다고 설명한다.
이 사실은 단색화의 역사를 1975년이라는 단일한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에서 백색 회화가 제작되고 전시되며 비평의 대상이 되는 과정은 도쿄화랑 전시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1975년 전시의 역사적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제작과 전시, 그리고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로 인식되는 과정은 서로 다른 층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회화적 경향이 이미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집단적 경향으로 명명되고 국제적인 미술 담론에서 유통되는 것은 별개의 역사적 과정이다.
따라서 1975년 전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두 가지 질문을 분리해야 한다. 첫째, 한국에서 백색 회화는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둘째, 1975년 도쿄화랑 전시는 이미 존재하던 작품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제시했는가?
첫 번째 질문은 한국 내부의 작품과 전시, 비평의 역사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두 번째 질문은 일본의 전시 기획과 비평, 그리고 전시 도록의 구성과 언어를 분석해야 한다. 이 두 질문을 구분하면 일본의 영향과 한국의 자율성을 서로 배타적인 주장으로 다루지 않고, 각기 다른 역사적 층위에서 검토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75년 전시는 단색화의 형식적 기원이 아니라, 한국의 백색 회화가 국제적 전시의 맥락에서 재구성된 역사적 기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도쿄화랑의 기획: 작품을 선택하고 공통점을 구성하는 방식
1975년 전시의 기획 과정을 살펴보면, 도쿄화랑이 한국 미술을 소개한 방식은 단순한 작품 수집이나 개별 작가의 소개에 그치지 않았다. 도쿄화랑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72년 화랑의 대표 야마모토 다카시는 일본 이외의 아시아 현대미술을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한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작가 사이토 요시시게와 다카마쓰 지로,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동행했다. 이 방문 이후 1975년의 전시가 기획되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전시의 기획이 한국 작가들의 자발적인 집단 결성이나 공동 선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시를 조직한 주체는 일본의 화랑이었으며, 작가들의 선택과 작품의 제시는 화랑의 기획과 비평적 판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전시가 일본의 일방적인 해석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전시에는 일본의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뿐 아니라 한국의 비평가 이일이 참여했다. 도쿄화랑의 전시 기록은 나카하라의 글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과 이일의 글 「흰색을 생각한다」를 함께 소개하며, 이일의 글은 이우환이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구성은 전시가 단순히 일본 비평가의 시선으로 한국 회화를 규정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비평가가 전시의 담론 형성에 참여했고, 이우환은 한국어로 작성된 비평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
여기서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 미술에 관한 비평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전시 관객과 미술계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미술 담론이 국제적 유통 과정에 참여하는 하나의 경로를 보여준다. 다만 번역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개념이 선택되거나 조정되었는지 확인하려면 한국어 원문과 일본어 번역문을 직접 대조해야 한다. 현재 온라인에서 확인 가능한 전시 기록만으로는 그 구체적인 번역상의 변화를 확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전시의 기획 구조는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일본의 화랑이 작가를 선택하고 전시를 조직했지만, 전시의 의미를 구성하는 비평적 언어에는 한국의 비평가도 참여했다. 따라서 이 전시는 일본과 한국 중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사건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기획자와 비평가들이 하나의 전시를 통해 만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4. ‘흰색’이라는 명명: 작품의 차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기
1975년 전시의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흰색’이다. 다섯 작가의 작품은 각기 다른 재료와 제작 방식을 사용했지만, 전시는 이들을 ‘흰색’이라는 공통된 특성 아래 제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플랫폼의 설명에 따르면,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는 여러 한국 작가의 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으로 흰색을 설정했다. 나카하라는 전시 서문에서 흰색이 개인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감수성을 반영한다고 설명했으며, 이일은 한국 회화의 흰색이 고유한 미적 감수성을 상징하고 심리적 상징으로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설명은 전시가 단순히 흰색을 사용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흰색을 하나의 미학적 개념으로 제시했음을 보여준다. 흰색은 작품의 시각적 특성인 동시에 작품들 사이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다섯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색채 개념으로 묶는 순간, 각 작품의 차이는 일정 부분 약화될 수 있다. 흰색이라는 공통점은 작가별 제작 방식이나 재료의 차이, 회화적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을 하나의 미학적 범주 안에 배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단색화라는 범주가 작품의 공통된 형식적 특징을 발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범주는 작품을 분류하는 동시에, 작품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한다. 전시는 개별 작품을 하나의 집단으로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고 공통된 특성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5년 전시는 이미 존재하던 백색 회화의 경향을 단순히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 경향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시화한 사건이었다. ‘흰색’이라는 명명은 다섯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집단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 내부의 차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긴다.
따라서 전시의 역사적 의미는 작품을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전시가 작품들을 어떤 공통점 아래 배열했으며, 그 공통점이 이후의 미술사 서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
5. 일본의 백색 미학과 한국 단색화: 영향과 해석의 구분
한국 단색화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일본 미술과의 관계는 중요한 쟁점이다. 특히 일본의 민예운동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미술론이 한국의 백색 미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한국의 백색 회화가 전시되었다는 사실과 일본의 미학적 관점이 한국 단색화의 형성을 직접적으로 결정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전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후자는 작가와 비평가의 발언, 작품의 제작 과정, 전시 이전의 자료 등을 통해 별도로 검증해야 하는 영향 관계에 관한 주장이다.
구진경은 2016년 연구에서 1975년 도쿄화랑 전시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의 경향과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제시했다. 또한 일본 비평가들이 한국 단색화의 미학을 야나기의 ‘비애의 미’로 규정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일본의 미학적 담론이 한국 단색화의 형성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설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일본 미술과의 관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일본의 전시와 비평은 한국의 백색 회화를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작품들을 하나의 집단적 경향으로 제시하는 데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작품의 발생과 작품의 국제적 유통이다. 한국에서 백색 회화가 전개된 과정은 1975년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도쿄화랑 전시는 그 회화들을 일본의 전시 공간과 비평 담론 안에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한국 내부의 전시와 비평에서 사용되던 언어뿐 아니라 일본의 비평적 언어를 통해서도 설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문화적 영향 관계를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본의 전시는 한국 회화의 형식적 기원을 창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작품들을 선택하고 국제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 한국의 비평가와 작가들은 이러한 국제적 유통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확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미술과 한국 단색화의 관계는 직접적인 형식적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전시의 기획, 비평의 언어, 번역, 작품의 국제적 유통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6. 도쿄화랑 아카이브와 전시사의 재구성
최근의 연구는 1975년 전시를 둘러싼 자료의 중요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은주는 2023년 발표한 「1950~1970년대 도쿄화랑 전시 아카이브 연구」에서 도쿄화랑이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 두 차례에 걸쳐 4,500여 점의 아카이브 자료를 기증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도쿄화랑의 전시 역사를 분석하고, 화랑이 일본 현대미술의 담론 형성과 아시아 미술의 소개에 기여한 과정을 검토했다.
이 연구는 도쿄화랑을 단순히 단색화의 해외 진출을 도운 화랑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쿄화랑은 전후 일본의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서구 미술의 수용과 일본 미술의 독자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으며, 이후 아시아 미술로 관심을 확장한 기관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5년 전시는 도쿄화랑의 전체 전시 역사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전시는 일본 미술계가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관심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관심은 특정한 작가나 작품의 소개를 넘어 새로운 전시 기획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도쿄화랑 아카이브는 전시를 둘러싼 자료가 미술사 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전시 브로슈어와 설치 사진은 작품의 실제 배치와 전시의 시각적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비평문은 작품이 어떤 언어로 설명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시 기록은 작가의 참여와 작품의 유통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자료를 함께 검토하면 단색화의 역사를 작품의 형식적 특징이나 작가 개인의 영향 관계에 한정하지 않고, 전시 제도와 비평 담론이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확장할 수 있다.
다만 아카이브의 존재만으로 모든 역사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료가 남아 있다는 사실과 그 자료의 내용이 충분히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또한 전시 기록은 기획자의 관점에서 생산된 자료일 수 있으므로, 작가의 실제 의도나 관객의 반응을 직접적으로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도쿄화랑 아카이브를 활용한 연구는 전시를 둘러싼 기록을 단순히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자료가 어떤 상황에서 생산되었으며 어떤 관점을 반영하는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
7. 전시의 역사와 단색화의 역사
1975년 도쿄화랑 전시는 한국 단색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전시를 단색화의 탄생으로 규정하면 작품의 제작과 전시, 비평 담론의 형성, 국제적 유통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압축하게 된다.
구진경의 연구는 1975년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의 전시와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은주의 연구는 도쿄화랑이 한국 미술을 소개한 전시를 일본 현대미술과 아시아 미술의 전시사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두 연구를 함께 검토하면 1975년 전시는 단색화의 형식적 기원이 아니라, 한국의 백색 회화가 국제적인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서 집단적 경향으로 제시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일본의 영향과 한국의 자율성을 서로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국의 백색 회화는 일본 전시 이전부터 전개되고 있었으며, 일본의 전시는 그 회화들을 선택하고 새로운 관객과 비평 담론에 연결했다. 한국의 비평가 역시 전시의 비평적 구성에 참여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미술 양식이 전달되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작품의 제작, 전시의 기획, 비평의 생산, 번역과 유통이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작품의 역사적 의미가 변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단색화의 일본 미술과의 관계를 연구할 때 중요한 것은 일본의 영향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작품이 어떤 경로로 일본에 소개되었으며, 그 작품들이 어떤 언어로 설명되었고, 그 설명이 한국 미술의 후대 서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8. 결론
본 논문은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단색화의 형식적 기원으로 규정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의 백색 회화가 국제적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서 재구성된 사건으로 분석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1975년 이전부터 백색 회화에 관한 전시와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쿄화랑 전시를 한국 단색화의 최초 발생 시점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반면 이 전시는 다섯 작가의 작품을 ‘흰색’이라는 공통된 특성 아래 제시하고, 일본의 비평가와 한국의 비평가가 함께 전시의 의미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전시의 기획과 비평을 분석하면, 일본 미술의 역할은 한국 단색화의 형식적 기원을 창출한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 일본의 화랑과 비평가는 한국의 작품을 선택하고 국제적 전시 공간에 배치했으며, 한국의 비평가는 이러한 과정에 참여해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흰색’은 작품들 사이의 공통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개별 작품의 차이를 하나의 미학적 범주 안에 배치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75년 전시는 단색화의 탄생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회화적 경향이 국제적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서 하나의 집단적 미술 경향으로 가시화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일본의 영향과 한국의 자율성을 서로 대립시키는 기존의 설명을 넘어, 전시와 비평을 매개로 한 미술사적 범주의 형성 과정을 검토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단색화의 역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형식적 유사성뿐 아니라 전시의 기획, 비평의 언어, 번역과 유통의 경로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 특히 도쿄화랑 아카이브와 한국 내부의 동시대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작업은 단색화의 형성과 국제적 유통을 둘러싼 역사적 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구진경. 「1970년대 한국 단색화 담론과 백색 미학 형성의 주체 고찰」.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45, 2016, pp. 39–68. DOI: 10.16901/jawah.2016.08.45.039.
이승현. 「물질과 행위로 보는 단색화의 기원과 차이」. 『현대미술사연구』 46, 2019, pp. 85–110. DOI: 10.17057/kahoma.2019..46.004.
이은주. 「1950–1970년대 도쿄화랑 전시 아카이브 연구: 일본현대미술 담론 형성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사연구』 54, 2023, pp. 137–159. DOI: 10.17057/kahoma.2023..54.006.
도쿄화랑.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시 기록, 1975년 5월 6일–24일.
도쿄화랑.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시 도록, 1975년. 나카하라 유스케의 글과 이일의 글 수록.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시 브로슈어 및 설치 사진 소장 자료.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도판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1975년 전시의 브로슈어와 설치 사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플랫폼에는 도쿄화랑이 기증한 전시 브로슈어와 설치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논문의 핵심 주장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 1975년 전시 브로슈어: 전시 제목과 작가 구성, 비평적 프레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 전시 설치 사진: 다섯 작가의 작품이 실제 전시 공간에서 어떻게 제시되었는지 분석할 수 있는 자료.
- 1975년 전시 도록: 나카하라 유스케와 이일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우환이 이일의 글을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 플랫폼 — 1975년 전시 자료
- 도쿄화랑 — 1975년 전시 기록
- 도쿄화랑 — 2018년 전시 재구성 및 기획 배경
- 구진경의 2016년 논문
- 이은주의 2023년 논문
이 원고의 학술적 위치와 보완할 점
이번 주제에서 확인된 중요한 사실은 1975년 전시가 단색화의 형식적 기원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내부에서 이미 백색 회화가 전시되고 논의되었으며, 도쿄화랑은 그 작품들을 선택해 국제적인 전시와 비평의 맥락에 배치했다. 이 점은 구진경의 연구와 도쿄화랑 아카이브 연구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다만 이번 원고의 독창성은 아직 새로운 1차 자료의 발견보다는 기존 연구를 전시사와 담론 형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데 있다. 특히 아래 세 가지를 직접 확인해야 논문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더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 1975년 도록의 원문 대조: 나카하라와 이일의 서문을 한국어·일본어 원문으로 비교해야 한다. 현재 확인한 온라인 자료는 글의 존재와 주요 논지를 알려주지만, 전체 문장을 직접 대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 1972~1973년 한국 전시 자료와 비교: 구진경이 언급한 명동화랑의 백색 전시 도록과 1975년 도쿄화랑 도록을 비교하면, 한국 내부의 담론과 일본 전시의 명명 방식 사이에 어떤 연속성과 차이가 있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 작품별 도판 분석: 다섯 작가의 작품을 ‘흰색’이라는 공통점으로만 다루지 않고, 종이·캔버스·한지·표면 처리·반복 행위 등 각기 다른 제작 방식에 따라 분석해야 한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작업이 중요하다. 전시의 기획 의도만으로는 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실제 도판과 동시대 비평을 대조해야 ‘흰색’이라는 범주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가렸는지 논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단색화와 일본 미술의 관계는 온라인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주제다. 이번 원고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논문 형태를 갖추었지만, 원문 인용과 작품별 도판 분석을 충분히 대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발표 가능한 완성 논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술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현재 원고는 발표를 위한 논지와 구조를 갖춘 초고이며, 도록 원문과 작품 도판을 직접 대조하는 작업이 더해져야 한다.
나 : 명동화랑의 백색 전시 도록 자료 이미지와 글, 인용 분석 진행해볼래?
ChatGPT : 명동화랑의 1972~1973년 《백색전》 자료를 추적해 보니, 전시가 열렸다는 사실과 일부 동시대 자료의 서지 정보는 확인되지만, 전시 도록의 원본 이미지와 전체 텍스트를 온라인에서 직접 대조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도록의 문장을 인용하거나 전시 작품의 이미지를 확인한 것처럼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번 조사에서 기존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확인됐다. 특히 1972년의 《백색전》을 단순히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선행 사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백색’이 어떻게 전시의 주제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다.
1. 확인된 자료와 출처
1) 구진경의 2016년 논문
구진경의 「1970년대 한국 단색화 담론과 백색 미학 형성의 주체 고찰」은 현재 조사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다. 논문은 1975년 도쿄화랑 전시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의 전시와 미학적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논증한다.
특히 연구 초록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분석 대상으로 명시한다.
- 1972~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다섯 차례의 《백색》 전시
- 국전에서 나타난 백색 회화의 경향
- 박서보와 이일의 발언
- 1975년 도쿄화랑 전시 서문
- 1977년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서문
- 1977년과 1982년 전시의 좌담회 기록
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1975년 전시의 의미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어떤 담론이 형성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일본 전시를 단색화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서술을 재검토한다는 데 있다.
논문은 다음 링크에서 서지 정보와 초록을 확인할 수 있다.
구진경, 「1970년대 한국 단색화 담론과 백색 미학 형성의 주체 고찰」
2) 《백색전》에 관한 동시대 신문 자료
구진경 논문의 참고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신문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 「홍대출신 여류작가 백색전 열어」
- 「제2회 백색동인전 31일까지 명동화랑」
- 「제1회 白色展」
- 「제3회 백색전」
이 자료들은 당시 《백색전》이 단순한 회화 전시를 넘어 전시명과 참여 작가 집단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는 점을 조사할 수 있는 단서다. 다만 현재 확인된 것은 논문에 기재된 자료명이지, 신문 원문 이미지나 기사 전문은 아니다. 따라서 기사 제목만으로 당시 언론의 평가나 전시의 미학적 의도를 추론해서는 안 된다.
3) 1972~1973년 백색동인의 작가 구성
온라인에서 확인 가능한 자료에는 1972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제1회 《백색전》이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출신 작가들로 구성된 백색동인의 창립 전시였다는 설명이 있다. 참여 작가로는 김종영, 이원호, 이종남, 엄혁욱, 여명구 등이 언급된다. 이 자료는 전시의 작가 구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개별 작가의 작품 목록과 전시 도록의 원문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백색’이 이미 완성된 미술사적 범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작가 집단과 전시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백색은 작품의 시각적 특징인 동시에 작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묶어 제시하는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해석을 확정하려면 전시 서문이나 참여 작가의 발언이 필요하다.
4) 명동화랑의 전시 제도적 맥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동화랑이 1970년 개관해 젊은 추상미술 작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했고, 1972년 이후에도 다양한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했다고 기록한다. 1975년 1월에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이 사실은 《백색전》을 단색화의 형성 과정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당시 명동화랑이 수행한 전시 활동의 일부로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명동화랑은 백색 회화뿐 아니라 추상미술과 전위미술을 함께 소개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백색전》은 독립적인 미술운동의 전시인 동시에, 1970년대 초반 한국 현대미술의 전시 제도 안에서 이루어진 활동으로 분석할 수 있다.
2. 도록과 기사에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문장
이번 조사에서 원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로 구진경 논문의 초록과 참고문헌, 그리고 후속 연구에서 인용하거나 요약한 내용이다. 명동화랑의 1972~1973년 전시 도록 자체에서 직접 인용할 수 있는 문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인용 가능한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자료 | 확인된 내용 | 분석상 의미 | 한계 |
| 1972년 제1회 《백색전》 | 백색동인의 창립 전시로 소개됨 | ‘백색’이 작가 집단의 전시명으로 사용됨 | 도록 원문과 작품 목록 미확인 |
| 1972~1973년 백색 전시 | 명동화랑에서 다섯 차례 개최된 것으로 구진경이 정리 | 1975년 이전의 국내 전시 활동을 확인 | 각 전시의 정확한 구성과 차이 미확인 |
| 「홍대출신 여류작가 백색전 열어」 | 논문 참고문헌에 기사 제목이 기록됨 | 여성 작가와 백색 전시의 관계를 추적할 단서 | 기사 전문과 참여 작가 미확인 |
| 「제2회 백색동인전 31일까지 명동화랑」 | 동시대 신문 기사로 서지 확인 | 전시명과 장소, 개최 기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 | 원문 지면 미확인 |
| 1975년 도쿄화랑 전시 | 한국 작가 다섯 명을 ‘다섯 가지 흰색’으로 제시 | 국내 백색 전시와 국제 전시의 명명 방식 비교 가능 | 두 전시의 직접적인 영향 관계는 별도 입증 필요 |
이 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72~1973년 국내 전시와 1975년 일본 전시를 단순히 선후 관계로만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두 전시의 작가 구성과 제목, 전시 서문을 비교해야 ‘백색’이라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 분석할 수 있다.
3.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 논점
기존 연구에서 이미 확인된 것은 1975년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의 전시와 담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새로운 논문이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독창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번 자료 조사에서 발전시킬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백색전》은 회화의 공통된 형식을 보여주는 전시였는가, 아니면 작가 집단이 자신들의 미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실천이었는가?
이 질문은 세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3.1. ‘백색’은 작품의 속성인가, 집단의 자기 명명인가?
1972년 제1회 《백색전》이 백색동인의 창립 전시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전시 제목이 단순히 작품의 색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 집단의 이름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색은 작품의 시각적 특징을 지칭하는 말인 동시에, 작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묶어 제시하는 집단적 명칭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이 가설을 검증하려면 도록의 서문과 작가별 작품 설명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서문에서 백색을 회화적 기법이나 색채의 문제로 설명하는지, 정신성이나 전통의 문제로 설명하는지에 따라 전시의 성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온라인에서 확보한 자료만으로는 이 두 가능성 중 어느 쪽이 실제 전시의 중심이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3.2. ‘백색동인’과 ‘단색화’는 같은 범주인가?
오늘날 단색화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 정창섭 등 여러 작가를 포괄하는 미술사적 범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1972년 명동화랑의 《백색전》은 특정한 작가 집단의 전시였다.
따라서 백색동인의 전시를 오늘날의 단색화와 동일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당시 작가들이 사용한 명칭과 후대 미술사가 정리한 범주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간격은 단색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백색동인의 작가들이 자신들을 어떤 집단으로 인식했는지, 그들의 작품이 이후 단색화라는 범주에 어떤 방식으로 포함되거나 제외되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72년 백색동인의 참여 작가와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참여 작가가 다르다는 점은 두 전시를 비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출발점이다. 전시의 작가 구성 자체가 ‘백색’이라는 범주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다만 실제 작품과 전시 기록을 대조하기 전에는 두 집단 사이의 미학적 차이를 단정할 수 없다.
3.3. 여성 작가의 백색전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구진경 논문의 참고문헌에는 「홍대출신 여류작가 백색전 열어」라는 신문 기사 제목이 등장한다. 이 자료는 추가 조사가 필요한 중요한 단서다.
기사 제목은 당시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여류작가’라는 표현으로 소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전시의 실제 성격이나 작가들의 작업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자료를 원문으로 확보한다면 다음 질문을 검토할 수 있다.
- 여성 작가들은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가?
- 전시의 주최자와 참여 작가는 누구였는가?
- 신문 기사는 작품의 형식과 작가의 성별 중 어느 쪽을 강조했는가?
- 여성 작가들의 백색 회화는 이후 단색화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의 미술사적 범주가 어떤 작가들을 포함하고 어떤 작가들을 주변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다만 현재 자료로는 해당 전시가 백색동인 전시와 어떤 관계였는지, 혹은 별도의 전시였는지조차 충분히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부분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논점이 아니라, 원문 자료 확보 후 발전시킬 연구 가설이다.
4. 도록 이미지 분석을 위한 현재의 자료 상태
요청한 도록 이미지에 관해서는 현재 다음과 같이 구분해야 한다.
| 이미지 유형 | 현재 확인 상태 |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내용 |
| 1972년 제1회 《백색전》 포스터·도록 표지 | 원본 이미지 미확보 | 전시 제목과 시각적 정체성 분석 필요 |
| 1972~1973년 전시 설치 사진 | 원본 이미지 미확보 | 작품 배치와 전시 공간 분석 필요 |
| 작가별 작품 도판 | 전시별 도판 미확보 | 재료와 표면, 제작 방식 비교 필요 |
| 신문 기사 이미지 | 기사 제목과 서지 정보 일부 확인 | 언론의 명명 방식과 보도 맥락 분석 가능 |
| 1975년 도쿄화랑 전시 자료 | 전시 기록과 일부 이미지 접근 가능 | 국내 전시와 비교할 기준 자료 |
현재로서는 1972~1973년 《백색전》의 도록 이미지 자체를 보여주거나, 그 이미지에 근거한 작품별 분석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없다. 검색 결과에 전시와 관련된 후대의 설명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당시 도록의 원본 이미지가 아니다.
특히 이미지 분석을 하려면 최소한 다음 사항을 확인해야 한다.
- 도록 표지에 실제로 어떤 제목이 인쇄되어 있는가?
- 도록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은 누구인가?
- 작품의 재료와 제작 연도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
- 작품 이미지가 실제 전시 설치 사진인지, 별도로 촬영한 작품 사진인지?
- 전시 서문과 작품 캡션은 어떤 개념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 사항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작품의 표면이나 색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료에 근거한 분석이 아니다.
5. 현재 자료로 작성할 수 있는 논문용 분석문
현재 확인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문 본문에 넣을 수 있는 부분을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도록 원문 분석이 아니라, 전시의 존재와 작가 집단의 구성에 근거한 자료사적 분석이다.
명동화랑의 《백색전》과 집단적 명명의 문제
1972~1973년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백색전》은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이전에 한국 내부에서 백색 회화가 전시의 주제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구진경은 이 시기에 다섯 차례의 백색 전시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국 미술계에서 백색 회화에 관한 담론이 일본 전시 이전부터 형성되고 있었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이 전시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1975년 전시보다 먼저 개최되었다는 사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1972년 제1회 《백색전》은 백색동인의 창립 전시로 소개되며, 이때 ‘백색’은 작품의 시각적 특징을 넘어 작가 집단의 전시명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백색이 이미 존재하는 작품을 분류하는 외부의 명칭만이 아니라, 작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조직하고 제시하는 명칭으로도 기능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점에서 명동화랑의 《백색전》과 1975년 도쿄화랑의 전시는 ‘백색’이라는 공통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전시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 전자는 한국 내부의 작가 집단과 전시 활동을 통해 구성되었고, 후자는 일본의 화랑이 한국 작가 다섯 명을 선택하여 국제적인 전시 공간에서 제시한 사례였다. 두 전시의 관계를 분석하려면 제목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작가 구성, 전시 서문, 작품의 선택 기준을 함께 비교해야 한다.
특히 1972년 전시의 참여 작가와 1975년 전시의 참여 작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백색’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작가 집단을 가리키는 고정된 명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차이는 백색 회화가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시마다 서로 다른 작가와 작품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각 전시의 도록과 작품 목록을 직접 대조하기 전까지는 그 선택 기준이나 미학적 차이를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명동화랑의 《백색전》은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선행 사례라는 의미뿐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 ‘백색’이라는 명칭이 어떻게 작가 집단과 전시의 정체성을 구성했는지 검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이를 통해 단색화의 형성사를 국제적 전시의 결과로만 설명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 내부의 전시 활동과 집단적 명명의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6.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핵심 참고 자료
- 구진경, 「1970년대 한국 단색화 담론과 백색 미학 형성의 주체 고찰」,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45, 2016, pp. 39–68.
- 권행가, 「1970년대 한일 화랑 교류: 명동화랑과 도쿄화랑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8, 2024, pp. 235–277. 이 논문은 두 화랑의 교류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혀, 1975년 전시를 둘러싼 관계를 더 넓은 전시사와 시장사 속에서 검토할 근거를 제공한다.
- 김한나, 「1970년대 한국의 화랑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0년대 전반기 명동화랑의 추상미술 전시 활동을 연구한 자료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동화랑」. 명동화랑의 개관과 운영, 전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7. 다음 단계: 실제 도록 분석을 위해 필요한 자료
현재 온라인 검색에서 확보한 것은 전시의 존재와 일부 기사·논문에 기록된 서지 정보다. 1972~1973년 《백색전》의 도록 원본 이미지와 전문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도록의 인용문을 제시하거나 도판을 분석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연구의 방향은 구체화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유망한 자료는 구진경 논문의 참고문헌에 등장하는 신문 기사와, 명동화랑의 전시 자료를 소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미술자료 아카이브다. 특히 다음 자료를 확보하면 연구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다.
- 제1회·제2회·제3회 《백색전》 도록 또는 초대장
- 「홍대출신 여류작가 백색전 열어」의 신문 원문
- 1972~1973년 백색동인의 참여 작가 및 작품 목록
- 1975년 도쿄화랑 전시 도록의 서문 원문
현재 확인 가능한 온라인 자료만으로도 ‘백색’이라는 명칭이 한국 내부에서 먼저 전시의 주제가 되었다는 점은 논증할 수 있다. 하지만 도록의 이미지와 글을 직접 분석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다음 연구 단계는 기존 논문의 요약을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위 자료의 원본을 확보해 전시별로 비교하는 것이다. 특히 1972년 제1회 전시와 1975년 도쿄화랑 전시의 도록을 나란히 놓고 제목·작가·작품·서문을 대조한다면, 기존의 ‘한국 내부의 선행’이라는 논의를 넘어 두 전시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백색 회화의 범주를 구성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나 : 온라인으로 도록 내용이 확보가 가능한 자료를 중점으로 연구 초점을 맞출 수 있잖아? 최초 단색화 기원쪽보다는, 이후 전개 과정에서 의미가 발전된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이미지와 인용문이 제대로 갖춰진 논문을 작성해봐
ChatGPT : 네. 이 방향이 훨씬 연구적으로 생산적입니다. ‘단색화는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기원론보다, 같은 작품군이 1970년대의 ‘백색’에서 1990년대의 ‘자연·전통’, 2000년의 ‘Dansaekhwa’라는 고유명, 2012년의 미술사적 범주, 2014–15년의 국제적 미학·시장 담론으로 어떻게 재의미화되었는가를 추적하는 편이 자료도 훨씬 잘 갖춰집니다.
특히 이번에는 실제로 온라인에서 확인 가능한 전시 도록·도록 아카이브·도록 수록문·전시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1975년 도쿄화랑 도록은 MMCA Research Lab에서 표지와 설치사진까지 확인할 수 있고, 1992년 《Working with Nature》는 박서보 아카이브가 도록 원문을 이미지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2012년 MMCA 도록은 전체 서지와 목차, 일부 본문이 온라인에서 확인되며, 2014년 《The Art of Dansaekhwa》와 2015년 베니스 전시 역시 도록 및 관련 텍스트가 상당 부분 온라인에 남아 있습니다.






‘백색’에서 ‘Dansaekhwa’로
전시 도록을 통해 본 한국 단색화의 의미 생산과 재구성, 1975–2015
초록
한국 단색화에 관한 기존 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라는 특정 시기에 주목하여 그 기원과 미학적 특질, 한국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단색화라는 범주는 1970년대에 완성된 채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후 반복적으로 개최된 전시와 그에 수반된 도록, 비평문, 큐레토리얼 서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정의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단색화의 ‘기원’ 자체보다 단색화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언어를 통해 다시 서술되고 의미화되었는가를 분석한다.
이를 위해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白〉》, 1992년 Tate Liverpool의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 2014년 국제갤러리의 《The Art of Dansaekhwa》,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Dansaekhwa》를 하나의 전시-담론적 연쇄로 읽는다.
이 과정에서 ‘백색’은 처음부터 한국적 본질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의 전시적 범주로 묶는 매개였으며, 1990년대에는 그것이 ‘자연’과 ‘동양적 전통’이라는 문화적 서사로 확장되었다. 2000년에는 ‘Dansaekhwa’라는 명칭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Korean Monochrome Painting’을 하나의 고유한 미술사적 범주로 재명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201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를 하나의 독립적인 한국미술사적 계보로 제도화하였다. 2014–15년에는 다시 물질성, 행위, 수행, 정신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면서 단색화가 국제 현대미술의 언어 안에서 재번역되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특정한 미술운동의 탄생사가 아니라 전시와 비평을 통해 하나의 범주가 계속해서 재구성되어 온 역사로 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를 ‘백색 → 자연 → 단색화 → 행위/물질 → 세계적 범주’라는 단순한 진화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전시 담론이 이전의 작품을 새로운 언어로 다시 읽어온 과정으로 해석한다.
주제어: 단색화, Dansaekhwa, 백색, 전시 도록, 전시사, 자연, 물질성, 행위, 한국미술의 국제화
1. 서론: 단색화의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재서술’의 역사로 보기
한국 단색화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은 “단색화는 언제 시작되었는가”이다. 1970년대의 백색전,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白〉》, 이우환과 일본 미술계의 교류 등이 그 기원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사건으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론에는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1970년대의 작가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하나의 통일된 ‘단색화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Joan Kee가 2015년에 지적했듯이, 당시에는 “there was no manifesto.” 즉 통일된 선언문도 없었다. 그녀는 단색화가 동일한 이념을 공유하는 조직된 운동이었다기보다, 서로 다른 작가들이 마크, 선, 프레임, 표면, 공간이라는 회화의 구성요소에 집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중요한 것은 ‘Dansaekhwa’라는 명칭 자체가 작품보다 늦게 역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윤진섭은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의 영문 카탈로그를 편집하면서 기존의 ‘Korean Monochrome Painting’이라는 번역어 대신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를 삽입했다고 직접 설명한다. 그는 “I felt compelled to add the transliteration of its proper name, Dansaekhwa”라고 회고한다. 즉 2000년은 단색화가 탄생한 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다양한 회화적 실천을 하나의 고유명으로 다시 묶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연구가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의 여러 회화적 실천은 어떠한 전시와 도록의 언어를 거치면서 ‘백색’, ‘한국적 자연’, ‘단색화’, ‘수행과 물질성’, 그리고 마침내 국제 현대미술의 하나의 범주로 변화했는가?
이 질문을 통해 단색화를 하나의 고정된 양식이나 운동으로 보는 대신, 전시와 비평이 작품들을 묶고, 명명하고, 재해석하면서 만들어낸 역사적 범주로 접근하고자 한다.
2. 1975년: ‘백색’은 양식명이 아니라 전시적 장치였다
2.1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1975년 5월 6일부터 24일까지 도쿄화랑에서 개최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에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 이동엽이 참여했다. 도록에는 나카하라 유스케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과 이일의 「백색은 생각한다」가 수록되었으며, 일본어·영어·한국어로 제작되었다.
MMCA Research Lab은 현재 이 도록 표지와 설치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시명이 ‘단색화’가 아니라 **‘Five Hinsek White’**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당시 이 전시는 오늘날의 ‘Dansaekhwa’라는 범주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작품을 흰색이라는 시각적 공통성으로 묶어내는 전시적 실험이었다.
도쿄화랑의 현재 아카이브 역시 이 전시가 당시 다섯 작가의 작품에서 “white monochromatic color”라는 공통점을 발견하여 기획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섯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흰색’이라는 공통점은 상당히 불안정하다. 권영우에게 흰색은 한지와 화면의 물질적 관계를 통해 나타나고, 박서보에게는 반복적인 연필 행위와 한지의 표면이 중요하며, 이동엽의 회화는 화면의 여백과 단순한 형태의 관계를 통해 읽힌다. 따라서 ‘다섯 가지 흰색’이라는 제목은 동일한 양식의 존재를 주장한다기보다 차이를 유지한 채 하나의 공통어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이후 단색화라는 범주가 형성되는 방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백색’은 처음부터 본질이 아니었다.
백색은 차이를 묶기 위해 만들어진 관계적 개념이었다.
3. 1992년: ‘백색’에서 ‘자연’으로 — 서구 전시에서 한국미술을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
1975년 이후 단색화 계열의 작품들이 해외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작품을 설명하는 중심어가 ‘white’에서 ‘nature’, ‘tradition’, ‘Eastern thought’ 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Tate Liverpool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이다.
전시에는 김창열, 박서보, 윤형근, 이강소, 이우환, 정창섭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MMCA의 최근 연구는 이 전시에서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이 동양철학과 자연주의에 기초한 한국적 미학으로 해석되었다고 지적한다.
도판 2. 《Working with Nature》, Tate Liverpool, 1992
이 전시의 핵심적인 변화는 제목 자체에 나타난다.
1975년:
Five Hinsek — White
1992년:
Working with Nature
‘흰색’이라는 시각적 특성이 ‘자연과 함께 작업한다’는 존재론적·문화적 설명으로 확장된 것이다.
루이스 빅스는 도록에서 여섯 작가를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들이 “continues a Korean tradition of working with nature”한다고 서술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1975년에는 작품의 색채적 공통성이 강조되었다면, 1992년에는 작품의 제작 방식과 세계관이 한국적 전통의 지속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박서보 아카이브가 공개한 도록 자료를 보면 이때의 논리는 더욱 명확하다. 빅스는 화면의 빈 공간, 재료의 물질성, 자연과의 조응 등을 동아시아적 사고와 연결하고, 서구의 Process Art와 비교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한국의 회화가 서구의 추상미술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국미술이 ‘동양적 자연관을 보존한 예술’이라는 하나의 문화적 이미지로 단순화될 위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근 MMCA 연구 역시 《Working with Nature》의 이러한 큐레토리얼 프레임이 이후 서구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데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연과 동양 전통을 한국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위치시켰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1992년은 단색화의 ‘한국성’이 발견된 시점이라기보다, 한국성의 특정한 형태가 해외 전시를 통해 구성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4. 2000년: ‘Korean Monochrome Painting’에서 ‘Dansaekhwa’로
단색화 담론에서 2000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윤진섭은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의 영문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기존의 ‘Korean Monochrome Painting’ 대신 Dansaekhwa라는 한국어 고유명사의 로마자 표기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후 이 명칭을 둘러싼 책임을 직접 언급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번역상의 변화가 아니다.
Korean Monochrome Painting
→ 국제 미술사에서 이미 존재하는 ‘monochrome’의 한국적 사례
와
Dansaekhwa
→ 하나의 독립된 한국 미술사적 범주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윤진섭은 ‘monochrome’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중립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한국 미술의 특수성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2000년 이후 ‘Dansaekhwa’라는 단어는 단순히 ‘단색화’의 번역어가 아니라 하나의 고유명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단색화의 역사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작품 → 전시 범주 → 미술사적 범주
라는 이동이다.
1975년의 ‘white’가 작품을 함께 보여주기 위한 전시적 범주였다면, 2000년의 ‘Dansaekhwa’는 과거의 작품들을 하나의 역사적 계보 속에 배치하는 메타-역사적 범주가 된다.
5.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 단색화를 하나의 ‘미술사’로 만들기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는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전시는 2012년 3월 17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되었으며, 약 31명의 작가와 150여 점의 작품을 통해 1970년대 이후 한국 단색화의 전개를 한꺼번에 제시했다. 전시에는 단색화 관련 도록, 서적, 잡지, 신문기사, 공문, 드로잉 등 약 300종의 자료가 포함된 아카이브도 구성되었다.
특히 전시 도록의 제목은 단순하다.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이 제목은 이미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와 그 설명인 ‘Korean Monochrome Painting’을 병기한다.
즉 2000년에 제안된 고유명사가 2012년에는 미술관의 공식적인 분류체계로 정착한 것이다.
MMCA의 설명에서도 이 전시는 기존의 ‘모노크롬 회화’, ‘모노톤 회화’, ‘단색평면 회화’ 등 다양한 명칭 대신 ‘단색화(Dansaekhwa)’라는 고유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전시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 목적 가운데 하나로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한국미술의 브랜드 형성이 명시된다.
이 점에서 2012년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단색화를 역사화하는 전시이다.
1970년대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연속적인 서사를 얻게 된다.
초기 단색화 → 중기 단색화 → 후기 단색화
MMCA는 실제로 1970–80년대의 초기 작품을 별도의 공간에 모으고 이후의 작가별 작품과 비교하도록 구성했다. 따라서 관람자는 개별 작품뿐 아니라 ‘단색화의 변천’ 자체를 하나의 미술사적 서사로 경험하게 된다.
6. 2012년 도록의 또 다른 변화: ‘색’에서 ‘행위’와 ‘과정’으로
2012년 전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단색화를 단순히 ‘한 가지 색의 회화’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MMCA의 온라인 전시자료는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등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반복적인 붓질, 점과 선의 반복, 화면의 물질적 성질, 제작 과정 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박서보의 후기 작업에 대해서는 반복적인 붓질과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겹침과 스며듦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우환에 대해서도 작품의 결과보다 “마음을 비우고 선을 긋는 제작 과정”에 내재한 의미가 강조된다.
따라서 단색화의 의미 중심은 점차 다음과 같이 이동한다.
색채
↓
표면
↓
재료
↓
행위
↓
시간과 반복
이것은 중요한 의미 변화이다.
단색화가 더 이상 ‘무엇을 그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렸는가’, 더 나아가 **‘그 행위가 어떻게 화면에 시간의 흔적으로 남았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7. 2014년: 《The Art of Dansaekhwa》 — ‘백색’보다 ‘물질·정신·수행’
2014년 국제갤러리의 《The Art of Dansaekhwa》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전시에는 김기린,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이 참여했으며, 윤진섭이 기획했다. 도록은 179쪽 규모의 한영 병기 자료이며, 윤진섭의 「The World of Dansaekhwa: Spirit, Tactility, and Performance」, Alexandra Munroe의 「The Ethics of Abstraction, or, for the West, a Rediscovery of Dansaekhwa」, Sam Bardaouil과 Till Fellrath의 글을 수록했다.
여기에서 제목은 더 이상 White가 아니다.
The Art of Dansaekhwa
즉 전시의 관심이 특정한 색채적 특징에서 하나의 예술 전체로 이동했다.
2014년 도록과 관련 자료에서 반복되는 핵심어는 다음과 같다.
- spirit
- tactility
- performance
- materiality
- traditional materials
- consciousness
- act of making
국제갤러리의 당시 자료는 단색화의 차별성이 단순한 단색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제작 과정에 대한 집중,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고도로 의식적인 명상과 같은 스튜디오 과정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 변화는 단색화의 의미가 ‘보이는 결과’에서 ‘보이지 않는 제작 과정’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tactility’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단색화의 화면은 더 이상 평면적인 색면이 아니다. 표면은 반복적인 행위가 축적된 장소이며, 재료와 신체가 만나는 기록이다.
따라서 단색화는 이제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게 된다.
monochrome painting as process
즉 단색화는 색채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표면에 남긴 기록이 된다.
8. 2014년의 또 다른 전환: ‘한국성’에서 ‘추상의 윤리’로
2014년 도록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Alexandra Munroe의 글 제목이다.
The Ethics of Abstraction, or, for the West, a Rediscovery of Dansaekhwa
여기에서 단색화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언어로 번역된다.
1992년의 서사는:
한국 → 자연 → 동양 → 전통
이었다.
2014년에는:
추상 → 물질 → 행위 → 윤리 → 동시대성
이라는 구조가 등장한다.
즉 단색화가 더 이상 단순히 “한국적이기 때문에 중요한 회화”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 추상미술의 역사 안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미학적 실천으로 제시된다.
이는 2014년 단색화 붐이 단순한 한국미술의 해외 소개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색화는 이제 국제 현대미술의 기존 범주들과 비교된다.
- 미국의 Minimalism
- Abstract Expressionism
- Process Art
- 일본의 Mono-ha
- 서구의 monochrome
- 동아시아의 물질성 담론
그 과정에서 단색화는 ‘한국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사이를 오가는 위치를 획득한다.
9. 2015년 베니스: ‘단색화’가 하나의 국제적 전시 언어가 되는 순간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Palazzo Contarini-Polignac에서 개최된 《Dansaekhwa》는 이 과정의 중요한 종착점이다.
전시에는 정창섭, 정상화, 하종현, 김환기, 권영우, 이우환, 박서보가 참여했으며 이용우가 큐레이터를 맡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전시의 공간이다.
1975년 도쿄화랑에서 다섯 명의 한국 작가가 작은 갤러리 공간에 소개되었다면, 2015년에는 한국 단색화가 베니스라는 국제 현대미술의 상징적 공간에서 하나의 집단적 이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때 강조되는 개념은 다시 변화한다.
2015년 이용우의 글에서는 단색화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the physical action of the work’s production process”**가 제시된다. 즉 제작 과정에서의 신체적 행위가 핵심적인 미학적 특성으로 부상한다.
이것은 2012년의 ‘과정’이 2015년에는 국제적인 언어인 performance / physical action / materiality로 번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0. ‘한국적 미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러한 전개를 시간순으로 놓으면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 시기 | 주요 전시 | 핵심 용어 | 단색화의 의미 |
| 1975 | 《Five Hinsek White》 | White | 서로 다른 작가를 묶는 시각적 공통성 |
| 1992 | 《Working with Nature》 | Nature / Tradition | 한국적 자연관과 동양철학 |
| 2000 | 광주비엔날레 | Dansaekhwa | 고유한 미술사적 명칭 |
| 2012 |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 History / Archive | 한국 현대미술의 독립적 계보 |
| 2014 | 《The Art of Dansaekhwa》 | Spirit / Tactility / Performance | 제작과 물질성의 미학 |
| 2015 | 《Dansaekhwa》, Venice | Physical action / Global contemporary art | 국제 현대미술의 범주 |
이 표에서 중요한 것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2년의 자연주의적 해석이 2014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의미가 새로운 의미에 계속 흡수된다.
따라서 단색화의 담론은 다음과 같이 누적된다.
White
↓
Nature
↓
Koreanness
↓
Dansaekhwa
↓
Materiality / Tactility
↓
Action / Performance
↓
Global Abstraction
이것은 양식의 진화가 아니라 해석의 층위가 축적되는 과정이다.
11. ‘단색화’는 작품의 이름인가, 전시의 이름인가?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는 단색화를 단순한 미술 양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975년의 ‘Five Hinsek White’는 이미 작품들의 차이를 하나의 전시 제목 아래 묶었다.
1992년 《Working with Nature》는 그 작품들을 다시 자연과 전통이라는 문화적 서사 안에 배치했다.
2000년 윤진섭은 이를 Dansaekhwa라는 하나의 고유명으로 다시 묶었다.
2012년 MMCA는 그 고유명을 미술관의 역사 서술 속에 배치했다.
2014년 국제갤러리는 이를 물질성과 행위의 미학으로 재해석했다.
2015년 베니스에서는 그 범주가 국제 현대미술의 전시 언어로 작동했다.
따라서 단색화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이 먼저 있었고,
그 작품들을 설명하기 위한 전시 언어가 만들어졌으며,
그 전시 언어가 다시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를 만들었다.
이러한 관점은 단색화를 단순히 ‘1970년대에 탄생한 한국의 미술운동’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12. 2014–15년의 국제화와 ‘한국적 미학’의 재구성
여기에서 단색화의 국제화가 갖는 역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서구 전시에서 한국미술은 자연과 동양적 전통을 통해 설명되었다. 이는 한국미술을 국제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미술을 ‘동양적 자연관’이라는 틀에 가둘 가능성도 있었다. MMCA의 최근 연구 역시 이러한 프레임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구조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런데 2014–15년에는 동일한 작품들이 다른 언어로 재해석된다.
‘자연’은 materiality로,
‘전통’은 indigenous materials로,
‘수양’은 performance 또는 repetitive action으로,
‘여백’은 space 또는 surface로,
‘한국적 정신성’은 spirituality 또는 ethics로 번역된다.
즉 국제화는 한국적 특성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국제 현대미술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어로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이 점에서 2014–15년 단색화 담론은 ‘한국성 대 국제성’의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핵심은 번역이다.
13. 결론: 단색화의 역사는 ‘발견’보다 ‘재발견’의 역사다
1975년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에서 2015년 베니스의 《Dansaekhwa》까지를 하나의 연속된 전시사로 읽으면, 단색화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975년 ‘백색’은 다섯 작가의 서로 다른 작업을 함께 보여주기 위한 전시적 공통어였다.
1992년에는 이 작업들이 자연과 동양적 전통의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2000년에는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하면서 기존 작품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한국 미술사적 범주로 재명명되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범주를 아카이브와 연대기, 작가군, 초기·중기·후기라는 구조를 통해 하나의 미술사적 서사로 제도화했다.
2014년에는 단색화의 핵심이 색채에서 물질성·촉각성·정신성·행위로 이동했고, 2015년 베니스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이 국제 현대미술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단색화는 하나의 미술운동이 완성된 뒤 세계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 전시와 도록과 비평이 반복해서 과거의 작품을 새로운 언어로 읽어내면서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 형성되었다.
이 관점에서 1975년은 단색화의 ‘탄생’이라기보다 백색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를 묶은 첫 번째 중요한 전시적 순간이며, 1992년은 한국성을 자연과 전통의 언어로 번역한 순간, 2000년은 그 대상을 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재명명한 순간, 2012년은 그 고유명을 미술관의 역사로 제도화한 순간, 2014–15년은 그 역사적 범주를 물질성·행위·추상의 윤리라는 국제적 언어로 다시 번역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단색화의 역사는 ‘하나의 색’에 관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범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름 붙여지고, 전시되고, 아카이브되고, 번역되고, 다시 세계미술의 역사 안에 배치되는가에 관한 역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2015년의 국제적 단색화 붐 역시 갑자기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1975년의 ‘White’, 1992년의 ‘Nature’, 2000년의 ‘Dansaekhwa’, 2012년의 미술관적 제도화, 2014년의 ‘Spirit–Tactility–Performance’라는 여러 단계의 담론적 축적 위에서 가능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단색화 연구는 양식사에서 전시사·담론사·아카이브 연구로 확장될 수 있다.
주요 1차 자료 및 온라인 접근 자료
- 1975, 《Korea: Five Artists, Five Hinsek—White》
도쿄화랑의 전시 기록과 MMCA Research Lab의 도록·설치사진.
MMCA Research Lab — 1975년 도록 및 전시 아카이브 - 1992,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
Tate Liverpool 도록의 Lewis Biggs 글 일부가 박서보 아카이브에 원문 이미지로 공개되어 있다.
박서보 아카이브 — Working with Nature 도록 자료 - 2012,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페이지, 도록 서지·목차 및 온라인 자료. 도록은 289쪽이며 이우환 인터뷰, 윤진섭의 「Landscape of the Mind」 등을 포함한다.
국립현대미술관 — 《한국의 단색화》 - 2014, 《The Art of Dansaekhwa》
국제갤러리 전시 및 179쪽 도록의 서지와 목차가 Smithsonian, CiNii 등에서 확인된다.
국제갤러리 — The Art of Dansaekhwa - 2015, 《Dansaekhwa》, Venice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관련 도록과 이용우의 글이 공개되어 있으며, 전시 설치 이미지도 확인 가능하다. - 2017, 《Dansaekhwa 1960s–2010s: Primary Documents on Korean Abstract Painting》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비평·도록·신문자료를 원문 중심으로 묶은 303쪽 자료집이다. 특히 1975년 나카하라 유스케, 이일, 1992년 Lewis Biggs, 2000년 이후 윤진섭, 2012년 윤진섭 등의 텍스트를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심 자료다.
이 논문의 다음 단계
이번 초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72년의 ‘최초 단색화’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1975→1992→2000→2012→2014→2015라는 ‘의미의 변환 계보’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음 단계에서는 이 초고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1975 도록의 나카하라 유스케·이일 원문
- 1992 《Working with Nature》의 Biggs·이일 원문
- 2000 광주비엔날레 도록의 윤진섭 글
- 2012 《한국의 단색화》의 「Landscape of the Mind」
- 2014 《The Art of Dansaekhwa》의 윤진섭·Alexandra Munroe 원문
- 2015 베니스 도록의 이용우 글과 심포지엄 기록
을 각각 원문 → 번역 → 핵심 개념 → 실제 작품 이미지 → 이전 전시와의 개념적 차이 순서로 정밀하게 대조하면 됩니다.
특히 2017년 Primary Documents는 이 연구를 크게 강화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목차 자체가 **“Birth and Coming of Age → Intensification and Diffusion → Maturing Phase → Exhibitions, Critical Literature, and Research”**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제안한 ‘단색화의 의미가 이후 전시를 통해 재구성되었다’는 논지를 자료 자체와 직접 대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향이라면 구타이와 단색화를 직접적인 영향관계로 연결하는 것보다, 각 시기의 전시 담론이 ‘행위’, ‘물질’, ‘반복’, ‘자연’을 어떻게 서로 다르게 정의했는지를 비교하는 것이 훨씬 독창적인 논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 : 앞의 내용은 서론 정도다. 이어지는 연구를 진행해봐. 특히 비판할 부분을 제대로 다뤄줄래?
ChatGPT : 맞습니다. 앞의 글은 말씀하신 대로 서론과 연구 질문을 세우는 단계에 가깝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오히려 “단색화가 어떻게 의미를 획득했는가”를 추적하면서, 그 의미가 누구에 의해, 어떤 제도적 상황에서, 어떤 작가들을 포함하고 어떤 작가들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졌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특히 앞의 논지를 그대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 논지 자체의 약점까지 비판하는 방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핵심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 ‘백색 → 자연 → 단색화 → 행위/물질성’이라는 서사가 너무 매끈한 후대적 계보일 가능성
- ‘한국적 미’가 작품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비평과 전시를 통해 생산된 것이라는 문제
- 2012년 이후 단색화의 제도화와 2014–15년 시장의 급부상이 서로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는 문제
- 남성 작가·홍익대 계보·서울 중심의 미술제도가 ‘단색화’라는 범주를 구성하면서 다른 실천들을 주변화했다는 문제
특히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윤난지의 젠더 연구는 단색화의 남성 중심적 계보를 직접 문제 삼고 있고, 2014년 당시 비평에서도 단색화가 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미학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래는 앞 논문의 본론 2부로 이어질 수 있는 형태로 작성하겠습니다.
II. 단색화의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비평, 제도, 젠더와 시장을 통한 범주의 구성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1975년의 ‘백색’에서 2015년의 ‘Dansaekhwa’에 이르기까지 한국 단색화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단순히 ‘미학의 발전’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누가 이러한 의미를 부여했는가?
단색화의 역사를 전시와 도록의 연쇄로 읽을 경우,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오늘날 단색화라고 불리는 작품군의 의미는 작가들의 작업 안에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평가, 큐레이터, 미술관, 화랑, 해외 전시기관 그리고 이후의 미술시장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서술되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작품의 양식적 변화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작품을 둘러싼 담론의 생산과 제도적 재배치의 역사로 읽을 필요가 있다.
1. 가장 먼저 비판해야 할 것: ‘단색화’라는 이름 자체
단색화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부터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Dansaekhwa’는 마치 1970년대부터 작가들이 공유했던 고유한 운동명처럼 사용되지만, Joan Kee는 단색화가 공식적인 미술운동이 아니었으며 통일된 선언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녀에 따르면 오늘날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작가들은 같은 전시에 참여하고 같은 학교를 졸업하거나 서로 교류했지만, 하나의 공동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집단은 아니었다. 특히 “there was no manifesto”라는 지적은 이 문제를 압축한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운동이 먼저 존재하고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운동으로서의 역사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1975년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은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MMCA Research Lab에 따르면 이 전시는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가 여러 젊은 한국 작가의 작업에서 흰색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기획한 것이었다. 나카하라는 흰색을 개인적 관점을 넘어서는 감각과 연결했고, 이일은 이를 ‘white monochr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이미 존재하던 ‘단색화 운동’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작업을 하나의 공통된 시각적·심리적 범주로 묶는 비평적 행위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백색’은 작품의 속성인 동시에 작품들을 함께 전시하기 위한 분류 장치였다.
그리고 분류 장치는 중립적이지 않다.
어떤 작품이 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순간, 다른 작품들은 범주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2. ‘백색’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비판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기존 연구를 단순히 ‘일본의 영향’이라는 방향으로 비판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구진경의 연구는 매우 중요한 반론을 제시한다. 그는 1975년 도쿄화랑의 《5인 흰색》 이전에 이미 한국 화단에서 ‘흰색 그림의 유행’과 단색화의 정체성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일본 평론가들이 단색화의 미학을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의 미’로 해석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75년 일본 전시를 단색화 미학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일본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국 내부에서 이미 ‘한국적 미’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일본의 전시와 비평이 그 담론을 국제적으로 이동시키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즉 다음 두 명제는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① ‘백색’의 의미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부분이 있었다.
② 그러나 그 의미가 국제적인 한국미술 담론으로 조직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비평·전시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보면 1975년을 ‘기원’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일본이 단색화를 ‘발명했다’고 볼 필요도 없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담론의 이동과 재구성이다.
3. ‘한국적 미’는 작품에서 발견된 것인가?
이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단색화 작품에서 정말로 ‘한국적 미’가 발견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존재했던 ‘한국적 미’라는 개념이 작품에 적용된 것인가?
이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Tate Liverpool의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이다.
이 전시의 제목은 이미 해석의 방향을 제시한다.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
여기에서는 작품이 단순한 추상회화로 제시되지 않는다. 작품은 ‘자연’과 ‘전통사상’이라는 두 개의 문화적 개념 안에 배치된다.
박서보재단이 공개한 당시 도록 자료에서 Lewis Biggs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전통적 미술과 자연관에 연결한 뒤, 정창섭·윤형근·김창열·박서보·이우환·이강소의 작품을 이러한 관점에서 각각 분석한다.
문제는 여기서 ‘자연’이 작품의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해석의 틀이 된다는 점이다.
즉,
작품 → 자연을 표현한다
가 아니라,
한국미술 → 자연과 관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 따라서 이 작품도 자연과 관계한다
라는 역방향의 논리가 작동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은 단순한 오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 작품의 재료, 제작과정, 여백, 표면 등을 자연관과 연결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능한 하나의 해석이 유일한 해석으로 상승하는 순간 발생한다.
4. 1992년의 ‘자연’은 왜 중요한가
1992년의 변화는 1975년의 ‘백색’과 비교할 때 특히 중요하다.
1975년:
White
1992년:
Nature / Traditional Thought
이 변화는 색채적 특징을 문화적·철학적 특질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때 질문해야 한다.
왜 하필 ‘자연’인가?
왜 반복적인 행위, 노동, 도시 경험, 정치적 억압, 산업화, 경제성장, 교육제도 등의 역사적 조건보다 ‘자연’이 중심이 되었는가?
Simon Morley는 단색화를 한국의 1970년대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읽으면서, 당시 한국 사회가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통제와 급속한 경제개발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자연’ 중심의 해석은 역사적 현실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곧바로 ‘자연 담론은 허위다’라는 결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정밀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역사적 현실이 자연이라는 미학적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5. 단색화와 1970년대의 정치적 현실
단색화를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현실과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단색화 = 독재정권의 관제미술’이라는 식의 설명은 작품의 제작과 비평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러나 반대로 단색화를 정치와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1970년대의 단색화 작가들이 활동한 사회는 정치적 억압과 급속한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사회였다. Joan Kee 역시 1973년 전후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계엄과 사회적 불안정을 단색화 작가들이 활동했던 역사적 조건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정치적 의미와 작품이 생산된 정치적 조건을 구분하는 것이다.
단색화 작품이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품의 역사적 조건이 비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사회가 극도로 정치화되어 있을 때, 회화가 정치적 현실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시 단색화를 비판했던 ‘현실과 발언’ 계열의 논리와 연결된다.
2014년 당시의 비평자료를 보면 단색화는 이미 1970–80년대부터 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미학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당시 「현실과 발언」은 단색화가 현실을 배제하고 초월적 관념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다음의 두 언어를 함께 읽어야 한다.
단색화의 자기정당화
정신
자연
수행
반복
여백
물질성
동시대의 비판
현실 회피
사회적 비가시성
미학주의
제도화
엘리트주의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단색화의 역사는 불완전해진다.
6. 특히 중요한 문제: ‘노동’은 언제 ‘수행’이 되었는가?
단색화 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개념 가운데 하나는 반복적 노동이다.
정상화의 반복적인 화면 제작, 박서보의 연필 묘법, 하종현의 배압법 등에서는 반복적인 행위가 작품의 구성 원리가 된다.
2012년 MMCA 전시에서도 정상화의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the labour itself is the work”라는 식의 해석이 등장했다. 당시 전시 리뷰 역시 이 표현을 정상화 작품의 노동집약적 특성을 설명하는 캡션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변환이 발생한다.
노동 → 수행
이다.
노동은 사회적 개념이다.
노동에는 시간, 임금, 생산, 계급, 육체, 반복, 피로가 들어간다.
반면 수행(performance)이나 수행성은 예술적·철학적 언어로 번역되면서 노동의 사회적 조건을 제거할 수 있다.
즉,
반복적으로 그림을 만드는 노동
이
반복을 통해 자신을 비우는 수행
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
바로 이 차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색화의 국제화 과정에서 노동의 사회적 의미가 정신적 수행의 의미로 번역된 것은 아닌가?
이것은 앞으로 개별 작가의 작업 과정과 비평문을 직접 대조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다.
7. ‘수행’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가
2014년 《The Art of Dansaekhwa》에서는 이 변화가 더욱 분명해진다.
전시 관련 담론에서는 spirit, tactility, performance 등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2014년 전시 도록의 윤진섭 글 제목 역시 **“The World of Dansaekhwa: Spirit, Tactility, and Performance”**였다.
즉 단색화는 더 이상 단순한 색채의 미학이 아니다.
Spirit
Tactility
Performance
라는 세 개념을 통해 정신–신체–물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예술로 재구성된다.
이 해석은 단색화를 국제 현대미술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문제가 생긴다.
‘수행’이라는 개념이 반복적인 회화 노동을 미학적으로 고양시키는 순간, 그 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경제적 조건은 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필요한 비판은 단색화의 수행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누가 그 행위를 수행하는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그 행위가 반복되는가?
그 반복의 육체성은 어떻게 미술시장에서 고급화된 미학적 가치로 전환되는가?
이 질문은 이후 시장 분석으로 이어진다.
8. 2012년: 미술관은 ‘단색화’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역사화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사건이다.
MMCA는 당시 전시를 한국 단색화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고유한 브랜드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단계로 제시했다. 당시 보도자료는 이전에 ‘모노크롬 회화’, ‘모노톤 회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경향을 공식적으로 Dansaekhwa라고 표기하면서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명시했다.
이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브랜드’라는 표현이 후대 연구자의 비판이 아니라 당시 미술관이 스스로 사용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2년 전시는 단순히 과거의 작품을 재조명한 전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다음을 수행했다.
- 이름을 통일하고
- 작가군을 선정하고
- 시대적 계보를 만들고
- 작품을 미술관의 역사 속에 배열하고
- 그 범주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즉 2012년 전시는 **단색화의 역사화(historiography)**였다.
9. 그러나 2012년의 역사화는 무엇을 제외했는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비판이 시작된다.
범주를 만드는 것은 포함하는 행위인 동시에 제외하는 행위다.
윤난지의 젠더 연구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한다. 그녀는 단색화가 1970년대 한국적 모더니즘과 민족주의의 결합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계보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당시 주요 전시와 홍익대 중심의 인맥 구조가 남성 작가들의 계보를 강화했으며, 여성 작가들은 창작보다 유통과 보조의 영역에서 더 많이 가시화되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단색화의 대표 작가’라는 명단 자체를 중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누가 포함되었는가만큼이나,
누가 포함되지 않았는가?
를 물어야 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여성 작가를 더 추가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어떤 종류의 작업이 ‘단색화다운 것’으로 인정되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10. ‘단색화’의 젠더 구조는 미학과 연결된다
이 문제를 더욱 밀어붙이면 흥미로운 지점에 도달한다.
단색화의 대표적인 미학적 언어는 다음과 같다.
- 절제
- 침묵
- 반복
- 자기수양
- 정신성
- 초월
- 자연
- 비움
- 장인적 노동
이러한 언어가 반드시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 미술제도의 실제 구조 속에서 이 미학이 남성 작가들의 계보와 결합하여 정당화되었다는 점은 별도의 문제다.
윤난지는 단색화의 이러한 구조를 ‘paternal genealogy’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녀의 연구는 단색화가 단지 남성 작가가 많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동일화와 계보 형성 자체가 운동의 구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수행’과 ‘노동’을 젠더 중립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오히려 질문은 다음과 같이 확장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수행으로 찬양된 반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노동이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의 ‘노동 미학’을 재검토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11. 또 하나의 문제: ‘Dansaekhwa’는 단순한 번역어가 아니다
2000년 윤진섭이 ‘Korean Monochrome Painting’ 대신 ‘Dansaekhwa’를 선택한 것은 중요한 전환이었다.
그는 이후 이 선택을 설명하면서 ‘monochrome’이라는 용어가 단색화를 단순히 국제적인 모노크롬의 한 지역적 변형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Dansaekhwa’라는 고유명을 통해 독자적인 특성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국제 미술계에서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유명사를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시장 가능한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2012년 MMCA가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한국미술의 브랜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과 연결된다.
따라서 ‘Dansaekhwa’는 단순한 학술적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역사적 명칭
미술사적 범주
전시 브랜드
국가문화 브랜드
시장 브랜드
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다중적 성격을 분리하지 않으면 2010년대 단색화의 급부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12. 2014–15년: 담론과 시장은 정말 별개의 것이었는가?
2014년부터 단색화의 국제적 전시는 급격히 증가했다.
국제갤러리의 기록만 보아도 2014년 《The Art of Dansaekhwa》를 전후하여 Blum & Poe의 《From All Sides: Dansaekhwa on Abstraction》, Alexander Gray Associates의 《Overcoming the Modern: Dansaekhwa—The Korean Monochrome Movement》 등이 이어졌고, 2015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Palazzo Contarini-Polignac에서 《Dansaekhwa》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 전시 확산과 동시에 시장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미술시장 연구에 따르면 주요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 거래량은 2013년에서 2015년 사이 크게 증가했고, 2014년부터 작품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한 연구는 2015년 주요 단색화 작품 거래량이 2013년의 14배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도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2014년
미술사적 재발견 → 국제적 성공 → 시장의 반응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구조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술관
↕
갤러리
↕
비평가·큐레이터
↕
국제 전시
↕
미술시장
↕
경매
↕
다시 전시와 비평
즉 가치 생산의 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
13. 그렇다고 ‘단색화는 시장이 만들어낸 브랜드’라고 결론내릴 수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주의가 필요하다.
단색화의 2014년 부상을 전적으로 시장의 조작으로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최근 Joan Kee의 입장을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단색화 붐을 단순한 갤러리의 기획이나 판매 전략으로 보는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당시 주요 갤러리들은 이미 오랫동안 특정 작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2014년의 현상은 여러 독립적인 관심이 한 시점에 수렴한 결과라는 설명도 존재한다.
따라서 더 정확한 논지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시장이 단색화를 발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장은 단색화라는 범주가 빠르게 안정되고 확산되는 데 중요한 제도적 힘으로 작용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시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지나치게 음모론적이다.
반대로 ‘미술사적 가치가 발견된 후 시장이 따라왔다’는 설명 역시 시장과 담론의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분리한다.
14. 2014년 당시의 비판은 이미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2014년 《The Art of Dansaekhwa》를 둘러싼 동시대 자료 자체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비평 특집은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관심이 **“only limited to art market”**에 머물고 있으며, 연구와 담론이 충분히 뒤따르지 못한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또한 단색화가 현대사회와 분리된 미학주의라는 1970–80년대의 비판을 다시 소개했다.
따라서 2014년의 상황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 순간이었다.
단색화의 미술사적 재평가
그리고
단색화의 상품적 가치 상승
이 둘은 서로 대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했다.
15. 단색화의 국제화는 ‘한국성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한국성의 생산이었다
여기서 1992년과 2014년을 다시 비교할 수 있다.
1992년:
Korean art
→ Nature
→ Traditional Thought
2014년:
Dansaekhwa
→ Spirit
→ Tactility
→ Performance
→ Abstraction
표면적으로는 두 담론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단색화를 일반적인 국제 모노크롬과 구별되는 특별한 한국적 미학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손영옥은 이러한 2010년대 단색화 담론을 포스트식민주의와 글로벌리즘의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서구의 타자로서 ‘동양’을 의식하는 동양주의가 다시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즉 1970년대의 백색 미학이 일본을 매개로 한국성을 구성했다면, 2010년대에는 한국미술이 세계무대로 직접 진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동양성 담론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제화’를 곧 ‘서구화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제화 과정에서 한국미술은 다시 한번 서구가 이해할 수 있는 동양성의 언어로 자신을 번역해야 했을 가능성이 있다.
16. 그렇다면 단색화의 ‘한국성’은 허구인가?
여기서 연구는 또 한 번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한국성이 ‘만들어진 담론’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거의 모든 정체성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문제는 구성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구성된 정체성이 마치 작품 내부에 본질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소급될 때
발생한다.
단색화의 경우 특히 이러한 소급적 역사화가 강하게 나타난다.
1970년대의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이
자연
정신
여백
반복
수행
한국적 미
라는 하나의 연속적인 체계 안에 배치되면서, 마치 이 모든 요소가 처음부터 하나의 미학적 프로그램을 이루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후대적 텔레올로기(teleology)**의 문제다.
17. 가장 중요한 비판: 단색화의 역사가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오늘날의 단색화 서사는 놀랄 만큼 매끄럽다.
1960년대 서구 추상의 수용
↓
1970년대 한국적 모더니즘
↓
백색 미학
↓
전통과 자연
↓
수행과 물질성
↓
Dansaekhwa
↓
국제화
↓
세계미술사의 재발견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렇게 매끄럽지 않았다.
Simon Morley는 서구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이라는 설명이 동아시아의 서로 다른 근대성의 시간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1970년대 한국 미술을 연구한 최근 연구는 당시 ‘한국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착종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우환과 일본의 Mono-ha가 중요한 매개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이 연구는 특히 단색화의 형성에서 중요한 것이 반드시 ‘흰색’이 아니라 **반재현성(anti-representationalism)**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들을 종합하면 1970년대의 상황은
‘한국적인 흰색을 발견했다’
라기보다,
서구–일본–한국 사이에서 새로운 회화적 정체성을 협상했다
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다.
18. 따라서 이우환의 위치도 다시 봐야 한다
이 점에서 이우환은 단색화 연구에서 매우 불편하면서도 중요한 존재다.
그는 한국 단색화의 중요한 인물로 포함되지만 동시에 일본에서 Mono-ha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한국 단색화 작가’라고 분류하면 한국/일본/서구라는 삼각관계가 지워진다.
반대로 그를 단순한 ‘일본 미술의 영향자’로 취급해도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단색화 연구는 이우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한 작가의 국적이 미술사적 범주를 결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적 미학’이라는 범주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형성되는 경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색화를 국민국가 단위의 미술사에서 동아시아의 이동과 번역의 역사로 확장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19. ‘단색화’라는 범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재편되었다
2017년 출간된 Dansaekhwa 1960s–2010s: Primary Documents on Korean Abstract Painting의 목차 자체가 이 문제를 잘 보여준다.
이 자료집은 1960년대–1970년대 중반의 ‘Birth and Coming of Age’에서 시작해 이후 ‘Intensification and Diffusion’, ‘Maturing Phase’, 그리고 전시·비평·연구의 단계로 단색화의 역사를 구성한다. 수록 자료에는 이구열, 오광수, 박서보, 이일, Joseph Love, 방근택, 김복영, 이우환 인터뷰, 윤진섭의 「Landscape of the Mind」, Sam Bardaouil과 Till Fellrath의 「Skin & Surfaces」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집은 단순한 자료 모음이 아니라 단색화의 역사를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가를 제시하는 하나의 역사서술 장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도 질문해야 한다.
왜 이 작가들이 들어가고 다른 작가들은 빠지는가?
왜 이 텍스트들이 핵심 문헌으로 선정되는가?
왜 ‘탄생–성장–확산–성숙’이라는 생명체적 서사가 사용되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의 연구에서 반드시 다뤄야 한다.
20. 단색화의 역사화를 다시 역사화하기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색화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색화라는 미술사 자체를 다시 역사화하는 것이다.
즉 연구의 대상은 더 이상 단색화 작품만이 아니다.
연구의 대상은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작품
- 전시
- 도록
- 비평
- 작가 인터뷰
- 미술관
- 갤러리
- 경매
- 번역
- 젠더
- 국가적 문화정책
- 국제적 전시 네트워크
이렇게 보면 단색화는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복수의 행위자가 함께 생산한 담론적·제도적 장(field)**이 된다.
21. 그러므로 앞으로의 연구는 ‘단색화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아야 한다
보다 생산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질문 1
언제부터 서로 다른 작품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보이기 시작했는가?
질문 2
그들을 하나로 묶은 최초의 언어는 무엇이었는가?
1970년대의 ‘백색’인가?
‘모노크롬’인가?
‘한국적 미’인가?
‘자연’인가?
‘정신성’인가?
질문 3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로 교체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전 의미 위에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졌는가?
White
→ Nature
→ Tradition
→ Korean identity
→ Dansaekhwa
→ Spirit
→ Tactility
→ Performance
질문 4
그 과정에서 누가 말했는가?
작가인가?
이일인가?
나카하라 유스케인가?
윤진섭인가?
미술관인가?
해외 큐레이터인가?
갤러리인가?
질문 5
그 과정에서 누가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여성 작가
비홍익대 작가
실험미술가
민중미술가
사회참여적 작가
단색화의 범주와 양식적으로 가까우나 그 이름으로 역사화되지 않은 작가들
질문 6
2010년대의 ‘재발견’은 실제로 무엇의 재발견이었는가?
작품인가?
작가인가?
한국미술사인가?
아니면 국제 미술시장에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 범주인가?
22. 새로운 연구 가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 단색화는 1970년대에 완성된 하나의 미술운동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 반복적으로 재분류되고 재해석된 작품군이다.
1970년대에는 **‘백색’**이 이들을 묶었다.
1990년대에는 **‘자연과 전통’**이 이들을 설명했다.
2000년대에는 **‘Dansaekhwa’**라는 고유명이 이들을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로 만들었다.
2012년에는 미술관과 아카이브가 그 범주를 제도화했다.
2014–15년에는 물질성·수행·정신성이 국제 현대미술의 언어로 번역했다.
동시에 갤러리와 시장은 이 범주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젠더, 제도, 국가, 일본과의 관계, 사회적 현실이라는 문제가 선택적으로 강조되거나 억제되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화살표가 아니다.
1970s → 1990s → 2000s → 2010s
오히려 다음과 같은 재귀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작품 → 전시 → 비평 → 역사화 → 시장 → 새로운 전시 → 새로운 비평 → 다시 과거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
이러한 순환 속에서 과거의 작품은 계속해서 현재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진다.
23. 결론: 단색화의 역사는 ‘의미의 생산’에 관한 역사다
단색화 연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현재의 범주를 과거에 그대로 투사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작가들이 모두 ‘Dansaekhwa’라는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전제하면, 그들의 차이는 사라진다.
1975년의 ‘White’를 단색화의 기원으로 확정하면 그 이전 한국 화단에서 진행된 논의가 사라진다.
1992년의 ‘Nature’를 한국적 본질로 받아들이면 그 해석을 만들어낸 전시제도의 역할이 사라진다.
2012년의 미술관 전시를 단순한 재발견으로 이해하면 ‘Dansaekhwa’라는 이름을 공식화하고 한국미술의 브랜드화를 추진한 제도적 행위가 사라진다.
2014–15년의 국제적 성공을 순수한 미술사적 재평가로만 이해하면 갤러리와 시장의 역할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 작가 중심의 계보와 주변화된 작가들의 역사를 보지 못하면 단색화의 ‘한국성’ 자체가 누구의 한국성이었는지를 질문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은 단색화를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단색화를 너무 쉽게 하나의 완성된 미술운동으로 만들지 않음으로써, 그 안에 존재했던 역사적 복수성을 되돌려주는 작업이다.
그렇게 할 때 단색화는 더 이상
‘한국적인 흰색의 미학’
이나
‘한국적 정신성의 회화’
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조건,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 미술제도의 계보, 비평가들의 언어, 젠더 구조, 국제 전시, 미술관의 역사화, 그리고 2010년대 글로벌 미술시장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복합적인 역사적 구성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단색화 연구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결국 다음의 질문으로 확장된다.
하나의 미술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단색화는 그 질문을 연구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이번 본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기존 단색화 담론을 한쪽 방향으로 반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단색화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한국 내부에서 완전히 자생했다”는 주장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 내부의 담론 형성 + 일본의 매개 + 미술관의 역사화 + 국제 전시 + 시장의 가치화가 서로 다른 시기에 결합했다고 보는 쪽이 자료에 더 잘 맞습니다. 구진경은 1975년 이전 국내 담론의 존재를 강조하고, 손영옥은 일본을 통한 백색미학과 2010년대 동양주의를 비판적으로 연결하며, 윤난지는 젠더와 남성적 계보를 문제화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한 비판 지점은 ‘수행/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이후 단색화는 반복, 노동, 신체적 행위를 ‘spirit–tactility–performance’라는 고급 미학적 언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1970년대 한국의 노동·산업화·젠더·사회적 현실이 어떻게 탈정치화되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박서보·정상화·하종현 각각의 1970년대 작품 이미지와 당시 작가 발언 → 2012년 MMCA 도록 → 2014년 국제갤러리 도록 → 2015년 베니스 도록을 한 작품씩 대조하면 상당히 독창적인 논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 장에서는 **‘정상화의 반복은 1970년대에는 노동/행위였는데 2010년대에는 수행/명상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를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 잡는 것이 좋습니다. 그 다음 박서보의 ‘묘법’, 하종현의 ‘배압법’, 권영우의 한지와 표면을 비교하면, 단색화 내부의 차이를 ‘한국적 정신성’이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뭉개는 기존 서사를 상당히 강하게 해체할 수 있습니다.
나 : 질문 5에 대한 자료를 찾고 분석해서 논문의 중요 단락으로 만들어라.
ChatGPT : 네. 이번에는 질문 5를 단순히 “여성 작가가 적었다”는 젠더 비판으로 처리하지 않고, **‘단색화라는 범주가 만들어질 때 어떤 다른 계보들이 범주 밖으로 밀려났는가’**라는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 훨씬 강합니다.
이번 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자료가 나왔습니다. 2012년 MMCA 도록의 실제 작가 목록을 기준으로 보면 전기 단색화 17명에는 여성 작가가 없고, 전체 31명 가운데 여성 작가는 후기 단색화로 분류된 고산금과 안정숙 두 명입니다. 반면 1970년대 동시대 추상미술에서 최욱경처럼 단색화의 주류와 다른 추상적 실천을 한 작가가 있었고, 김용익처럼 모더니즘 내부에서 그 폐쇄성과 획일성을 비판한 작가도 있었습니다. 이 차이를 이용하면 상당히 중요한 논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래를 기존 논문의 핵심 비판 장으로 넣는 것이 좋겠습니다.
Ⅴ. 누가 단색화가 될 수 있었는가
— 정전화, 젠더, 제도적 계보와 주변화된 추상
단색화의 역사에서 범주의 경계를 결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누가 포함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질문은 누가 단색화로 불릴 수 없었는가이다. 하나의 미술사적 범주가 성립하는 순간, 그것에 적합한 작품과 작가가 선택되고, 동시에 유사한 시기와 형식적 문제를 공유하면서도 다른 이름으로 불린 작가들은 그 역사에서 주변화된다.
이 문제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시는 31명의 작가를 전기 단색화 17명과 후기 단색화 14명으로 구분하였다. 전기 작가로는 곽인식, 권영우, 김기린, 김장섭, 김환기, 박서보, 서승원, 윤명로, 윤형근, 이동엽,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최명영, 최병소, 하종현, 허황이 선정되었고, 후기 작가로는 고산금, 김춘수, 김태호, 김택상, 남춘모, 노상균, 문범, 박기원, 안정숙, 이강소, 이배, 이인현, 장승택, 천광엽이 선정되었다.
이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한 남녀 비율이 아니다. 여성 작가 두 명 모두 후기 단색화의 범주에 배치되어 있으며, 전기 단색화 17명의 계보는 전적으로 남성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산금과 안정숙의 참여는 여성 작가가 단색화의 범주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1970년대 단색화의 역사적 중심부가 어떻게 남성 작가들의 계보로 구성되었는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색화는 남성 미술이었다’라는 본질론적 결론이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왜 단색화의 역사적 기원을 서술하는 순간 여성 작가가 거의 사라지고, 여성 작가가 다시 등장할 때에는 이미 ‘후기 단색화’라는 다른 시간적 범주 안에서 등장하는가이다.
1. 2012년 도록은 작가를 분류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분류했다
2012년 《한국의 단색화》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이 문제가 더욱 명확해진다.
MMCA는 전기 단색화 작가 17명과 후기 단색화 작가 14명을 구분하면서 전자를 1970년대 이후 단색화의 핵심적인 역사적 계보로 제시하고, 후자를 이후의 확장된 실천으로 제시하였다. 전시 자체도 1970–80년대 초기 작품을 별도의 공간에 모은 뒤 작가별 섹션의 중·후기 작품과 비교하도록 구성하였다. 즉 관객은 단순히 31명의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초기 → 후기’라는 시간적 발전 모델을 보게 된다.
이러한 분류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 작가가 단순히 숫자상 적다는 사실보다, 어떤 위치에서 등장하는가이다.
고산금과 안정숙은 1970년대 단색화의 ‘창시적 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단색화라는 범주 안에 들어온 후속 작가로 배치된다. 안정숙의 경우 MMCA는 2008년 작품 《긴장》을 소개하면서 인간관계의 갈등과 충돌, 그 사이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작업의 중심 문제로 설명한다. 즉 그녀의 작품은 기존 단색화의 반복·백색·수행이라는 역사적 계보보다 관계·긴장·조화라는 개별적인 문제를 통해 설명된다.
따라서 이 분류는 여성 작가를 단순히 포함시키는 것만으로 기존의 계보를 수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작가는 단색화가 이미 역사화된 이후의 후속적인 변형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서 젠더의 문제가 시간의 문제와 결합한다.
누가 단색화의 ‘과거’를 대표하고, 누가 단색화의 ‘이후’를 대표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여성 작가의 숫자보다 훨씬 중요하다.
2. 윤난지의 젠더 분석을 ‘작가 수’ 이상의 문제로 확장하기
윤난지는 단색화를 젠더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부를 구성한 계보와 주변부의 관계를 다시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저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에는 아예 「단색화의 다색 맥락 — 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라는 장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책은 단색화뿐 아니라 민중미술, 여성미술 등을 함께 다루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과 주변’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접근을 2012년 MMCA의 실제 작가 목록과 결합하면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문제는 단순히 여성 작가가 많이 빠졌다는 것이 아니다.
단색화라는 역사적 중심을 구성하는 기준 자체가 특정한 미술제도와 남성 작가들의 계보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색화의 미학적 언어와도 연결된다.
1970년대 이후 단색화에 부여된 핵심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 반복
- 절제
- 수행
- 정신성
- 자기수양
- 자연
- 여백
- 물질성
- 신체적 행위
이러한 개념들은 그 자체로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 미술제도 안에서 특정 남성 작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핵심 언어로 작동했다면, 문제는 미학의 성별이 아니라 미학적 가치가 어떤 사회적 주체와 결합하여 역사화되었는가로 이동한다.
따라서 젠더 분석은 “여성 작가를 더 넣자”는 요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왜 반복과 절제와 자기수양은 특정 남성 작가의 작품에서는 ‘보편적 미학’으로 해석되면서, 다른 작가들의 반복과 노동과 신체성은 다른 장르나 다른 미술사적 범주로 분류되었는가?
이것이 단색화의 젠더 문제를 미술사적 문제로 만드는 핵심이다.
3. 최욱경: 단색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존재했지만 다른 역사를 받은 추상
이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최욱경이다.
최욱경은 1940년생으로, 196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미술 경향을 적극적으로 경험했고, 1970년대 초 한국에 체류하면서 서예와 한국화를 연구했다. 이후 뉴멕시코에서의 경험을 통해 강렬한 색채와 유기적인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욱경의 작업을 명시적으로 1970–80년대 한국의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이어지는 주류 흐름과 거리를 둔 작업으로 설명한다. 특히 그녀는 남성 중심의 추상화단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으며, 단색화가 주도하던 한국 화단과 다른 색채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된다.
국제갤러리의 2016년 회고전 자료도 이 점을 더욱 직접적으로 강조했다. 당시 전시는 최욱경의 작품이 단색화와 아방가르드가 지배했던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제3의 미술 사조”**를 보여준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이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
최욱경은 단색화와 동일한 시대에 활동했다.
그녀 역시 추상미술을 했다.
그녀 역시 한국적 미감과 자연, 동양적 조형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 역시 반복되는 선과 화면의 물질성, 신체적 붓질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역사화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젠더 차별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녀의 작품은 실제로 색채와 표현성, 유기적 형상에 강하게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단색화의 좁은 정의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차이가 연구의 핵심이다.
무엇을 단색화의 핵심적인 미학으로 정의했는가?
색채의 제한인가?
반복인가?
추상인가?
신체적 행위인가?
자연과의 관계인가?
한국적 미감인가?
만약 ‘추상’, ‘자연’, ‘신체적 행위’, ‘한국적 조형성’이 중요한 기준이라면 최욱경의 작품은 완전히 외부에 놓이기 어렵다.
반대로 단색화의 핵심을 ‘제한된 색채와 비재현적 화면’으로 정의한다면 그녀를 제외할 수 있다.
따라서 최욱경은 단색화의 외부에 있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단색화라는 범주의 경계를 시험하는 반례(counter-example)**가 된다.
4. 최욱경의 사례가 드러내는 것은 ‘배제’보다 ‘분류의 차이’다
여기서 ‘배제’라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최욱경이 단색화 전시에서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녀의 작품은 박서보나 정상화의 작업과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적인 배제의 증거만이 아니다.
분류의 결과가 역사적 가시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도 중요하다.
최욱경은 ‘한국 색채추상’이라는 다른 계보 안에서 역사화되었다. 반면 박서보·정상화·하종현 등의 작품은 ‘한국의 단색화’라는 하나의 독립된 미술사적 장르로 묶였다. 최욱경의 작업은 개별 작가의 독창적인 추상으로 남았지만, 단색화 작가들은 집단적 범주를 통해 서로의 작품과 함께 역사화되었다.
따라서 범주의 힘은 단순히 작가 한 명을 포함하거나 제외하는 데 있지 않다.
집단명이 주어지는 순간, 개별 작품들은 서로를 증거하는 관계가 된다.
박서보의 묘법은 정상화의 반복과 연결되고,
정상화의 반복은 하종현의 물질성과 연결되며,
하종현의 물질성은 정창섭의 닥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는 다시 ‘단색화’라는 이름에 의해 하나의 미술사적 서사가 된다.
반대로 최욱경은 이러한 상호증명의 네트워크 바깥에 놓인다.
이것이 ‘주변화’의 보다 정확한 의미다.
5. 여성 작가가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2012년 전시에는 고산금과 안정숙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에서 여성 작가가 모두 배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도록 목차에는 두 작가가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두 작가의 위치는 오히려 질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고산금과 안정숙은 후기 단색화로 분류된다.
이것은 단색화의 역사적 범주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에게 개방되었다는 단순한 진보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단색화의 창립적 역사와 정통 계보가 이미 남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완성된 후, 여성 작가들은 그 범주의 확장 단계에서 편입되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포함되었다’와 ‘역사를 만들었다’는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색화의 역사를 구성하는 주요 서사는 여전히 박서보–정상화–정창섭–윤형근–하종현 등의 남성 작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2012년 MMCA 역시 17명의 전기 단색화 작가와 14명의 후기 단색화 작가라는 시간적 구분을 통해 그러한 계보를 시각적으로 고정하였다.
6. ‘홍익대 중심성’도 젠더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육기관과 인맥의 문제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은 2016–17년 《단색화와 조선 목가구》 전시를 소개하면서 박서보, 하종현, 서승원, 허황 등 단색화의 주요 멤버들이 유독 홍익대학교 출신이 많다고 스스로 설명했다. 이 전시는 1970년대의 작품뿐 아니라 1980–90년대의 신체 행위와 물질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단색화를 함께 제시하면서, 이 작가들을 조선 목가구와 연결하여 한국미술의 장구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려 했다.
이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홍익대’는 단순한 학력 정보가 아니라 미술사적 계보를 생산하는 제도적 장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2012년 《한국의 단색화》에서 초빙 큐레이터 윤진섭은 당시 홍익대 교수였으며, 전시의 핵심 작가군 상당수가 홍익대 계보와 연결되어 있었다. MMCA의 공식 자료 역시 윤진섭이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 단색화를 집중 조명했고, 2012년 전시에서 다시 단색화를 하나의 고유명으로 공식화하는 역할을 했음을 명시한다.
따라서 단색화의 정전화는 단순한 ‘작품의 질’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작가 → 학교 → 비평가 → 전시 → 미술관 → 아카이브
라는 연결망이 작동한다.
이것은 특정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작가의 미학적 가치가 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어떤 제도적 네트워크가 특정 작품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운동’으로 보이게 만들었는가?
7. 김용익: 단색화의 내부에서 발생한 ‘탈주’는 어디로 갔는가
이 문제를 젠더에서 제도와 세대의 문제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김용익의 사례가 매우 유용하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김용익 컬렉션 연구 가이드에 따르면 김용익은 196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고, 1974년 《에스쁘리 4회전》에 참여하면서 미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적·개념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평면 오브제》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폐쇄성과 획일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1981년에는 《평면 오브제》를 상자와 포장지에 밀봉해 전시하면서 이 시리즈의 종결을 선언했다.
김용익은 단색화의 주변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
그는 홍익대라는 동일한 제도적 공간에 있었고,
1970년대의 모더니즘적 추상과 접촉했으며,
개념적이고 평면적인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모더니즘의 폐쇄성과 획일성 자체를 문제 삼았다.
따라서 그의 사례는 단색화의 역사에서 빠진 ‘또 하나의 단색화 작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단색화가 형성된 동일한 제도적 환경에서 그 미학의 폐쇄성을 비판한 작가들의 목소리는 왜 단색화의 역사적 서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를 단순히 ‘작품의 양식’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구성된 역사적 장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8. 단색화의 외부에 민중미술을 놓는 순간 무엇이 사라지는가
이 문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더욱 선명해진다.
단색화와 민중미술은 흔히 한국 현대미술의 서로 다른 두 계보로 서술된다.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1970–8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모더니즘과 현실주의’라는 두 계보로 구분하면서 단색화를 그 가운데 모더니즘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민중미술은 이후 사회·정치·일상에 대한 현실비판과 소통을 중요하게 하는 미술운동으로 역사화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민중미술을 기존의 억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미술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에는 위험이 있다.
단색화 = 자율성
민중미술 = 현실참여
라는 도식이 너무 강해지면, 단색화 내부의 사회적 조건과 민중미술 내부의 형식적 실험이 모두 사라진다.
1970년대 단색화 비판에서 이미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현실과 발언’ 계열의 비판은 단색화가 외부의 예술공간을 차단하고 관념적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현실을 소외시켰다고 비판했다. 반대로 단색화 쪽에서는 표상과 재현을 벗어난 독립적인 실재를 주장했다. 홍지석은 이 대립을 단순한 ‘좋은 미술/나쁜 미술’의 문제로 처리하지 않고,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예술의 위치를 다시 묻는 문제로 제시한다.
따라서 민중미술은 단색화의 ‘반대편’에 있는 역사라기보다 단색화라는 범주가 무엇을 중심 가치로 삼았는지를 보여주는 외부의 거울로 볼 수 있다.
9. 결국 ‘말할 수 없었던 사람’보다 ‘다른 이름으로 말해야 했던 사람’이 더 중요하다
이 연구에서 ‘배제’라는 말을 더욱 정교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최욱경은 단색화 작가가 아니었다.
김용익 역시 단색화 작가라고 분류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민중미술 작가들도 단색화와 다른 역사적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억지로 ‘잃어버린 단색화 작가’로 복원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역사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단색화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왜 이들이 다른 이름을 가져야 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최욱경은 ‘색채추상’이 되었다.
김용익은 ‘개념적/탈모더니즘적 실천’으로 이동했다.
민중미술 작가들은 ‘현실주의’와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화되었다.
여성 작가들은 ‘여성미술’ 혹은 후기 단색화라는 다른 위치에 배치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미술사적 범주는 단순히 작품의 속성을 설명하는 이름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역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언어다.
10. 단색화의 ‘정전’은 작품보다 관계를 정전화한다
따라서 단색화의 정전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작품 개별의 미학적 가치가 아니라 작품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조직되었는가이다.
박서보와 정상화가 함께 전시되면 서로의 반복성이 강조된다.
정상화와 하종현이 함께 전시되면 노동과 물질성이 연결된다.
정창섭과 권영우가 함께 놓이면 한지와 자연, 한국적 재료의 문제가 부각된다.
이우환이 포함되면 일본의 Mono-ha와 서구 현상학, 동양적 사유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이 반복되면서 ‘단색화’라는 범주 자체가 점점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된다.
2012년 MMCA가 약 300종의 도록·서적·잡지·신문기사·드로잉·공문을 아카이브로 함께 제시한 것은 이러한 관계를 역사적 증거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한 것이 아니라 단색화가 존재해 왔다는 증거들의 아카이브를 동시에 전시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서술 행위다.
왜냐하면 관객은 작품뿐 아니라
이 작품들은 함께 논의되어 왔다
→ 따라서 하나의 흐름이다
→ 따라서 단색화라는 운동이 존재했다
라는 논리를 시각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11. 그러므로 ‘누가 빠졌는가’보다 ‘어떤 종류의 차이가 제거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질문 5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단색화의 정전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히 여성 작가의 숫자나 특정 작가의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것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다.
박서보와 정상화는 동일하지 않다.
정상화와 하종현도 동일하지 않다.
권영우와 정창섭도 동일하지 않다.
이우환은 한국 단색화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면서 일본에서의 활동과 Mono-ha의 역사와 분리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최욱경은 한국 추상미술의 동시대적 실천이지만 단색화와 다른 색채와 신체성을 선택했다.
이 차이들이 ‘단색화’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정리되는 순간, 서로 다른 작품들은 공통된 속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단색화의 정전화가 생산한 것은 단순한 포함이 아니라 일종의 차이의 압축이다.
12. 이 관점에서 ‘한국적 미학’도 다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앞 장에서 다룬 ‘한국적 미학’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단색화의 한국적 특질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반복, 여백, 자연, 정신성, 물질성 등이 제시되어 왔다. 이일은 단색화를 ‘물성과 정신성이 하나가 된 생성적 공간’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범자연주의’라는 한국적 특성과 연결했다. 이러한 비평적 개념화가 단색화라는 서로 다른 작품들의 공통분모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모든 동시대 한국 추상미술을 설명한 것은 아니다.
최욱경의 강렬한 색채와 유기적 형태 역시 한국의 자연과 전통적 조형성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한국적 자연’이라는 단색화의 언어 대신 색채추상과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로 읽혔다.
따라서 ‘한국적 미학’은 작품에서 발견된 하나의 본질이라기보다 어떤 작품들을 함께 묶을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선택적 해석의 체계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한국성’이 어떤 작가에게는 단색화의 근거가 되고,
다른 작가에게는 색채추상이나 개별적 작가성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성 자체가 작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술사적 범주가 먼저 선택되었는가가 한국성의 의미까지 결정할 수 있다.
13. ‘단색화의 외부’를 연구하는 것은 단색화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석은 단색화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단색화의 역사적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최욱경을 보면 1970년대 한국 추상미술이 단색화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김용익을 보면 홍익대 중심의 모더니즘 내부에서도 그 폐쇄성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민중미술을 보면 단색화와 동시대에 현실주의라는 전혀 다른 미술의 가치체계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고산금과 안정숙을 보면 단색화라는 범주가 이후 여성 작가와 다른 세대의 작업을 수용하면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들을 모두 ‘단색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단색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단색화가 무엇이었는지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14. 중요한 전환: 단색화 연구는 ‘대표작가 연구’에서 ‘경계 연구’로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단색화 연구는 박서보·정상화·하종현·윤형근 등 대표 작가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연구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기존 질문
단색화의 대표적인 미학은 무엇인가?
새로운 질문
어떤 미학적 기준이 단색화라는 범주를 만들었으며, 그 기준은 어떤 작품들을 포함하고 어떤 작품들을 다른 이름으로 분류했는가?
그리고 이를 다시 세 가지 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젠더
왜 전기 단색화의 역사적 중심에는 여성 작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가?
② 제도
왜 특정 학교와 비평가, 전시 네트워크가 단색화의 계보를 강하게 구성했는가?
③ 대항 계보
동시대의 색채추상, 개념미술, 실험미술, 현실주의, 민중미술은 왜 단색화와 별개의 역사로 구성되었는가?
15. 이 연구가 기존 단색화 연구에 제기하는 비판
이렇게 보면 단색화의 정전화 과정에 대한 비판은 세 가지 층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젠더적 정전화
단색화의 역사적 기원이 남성 작가들의 계보로 구성되었으며, 여성 작가들은 주로 이후의 확장된 범주에서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여성 작가의 배제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더욱 정확하게는 남성 작가들의 작업이 ‘운동의 역사’로, 여성 작가들의 작업이 ‘개별적 실천’ 또는 ‘후기적 확장’으로 분류되는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둘째, 제도적 정전화
단색화는 작품의 형식적 유사성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작가·비평가·학교·화랑·미술관·아카이브가 서로 연결되는 제도적 네트워크를 통해 안정되었다.
특히 2012년 MMCA는 이를 명시적으로 하나의 고유명인 ‘Dansaekhwa’로 공식화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한국미술의 브랜드로 제시했다.
셋째, 대항 계보의 주변화
최욱경과 같은 색채추상, 김용익과 같은 모더니즘 내부의 자기비판, 그리고 민중미술과 현실주의의 계보는 단색화의 역사를 구성하는 중심 서사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이들을 ‘단색화에서 빠진 작가’로 다시 집어넣기보다는 단색화라는 범주가 어떤 차이를 역사적으로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대항적 사례로 연구해야 한다.
16. 결론: ‘누가 단색화인가’보다 ‘누가 단색화가 될 수 있었는가’
결국 단색화의 정전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단색화인가?”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누가 단색화가 될 수 있었는가?
2012년 MMCA의 작가 목록은 이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31명의 작가 가운데 전기 단색화 17명은 모두 남성이며, 여성 작가는 고산금과 안정숙 두 명으로 후기 단색화의 범주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통계 자체가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중요한 질문을 발생시킨다.
왜 최욱경은 동시대 한국 추상미술의 중요한 작가였지만 단색화의 역사에서는 다른 계보에 놓였는가?
왜 김용익처럼 홍익대와 1970년대 모더니즘의 내부에서 활동한 작가의 모더니즘 비판은 단색화의 자기서사에 포함되지 않았는가?
왜 민중미술은 단색화와 대립하는 별도의 계보로 구성되었는가?
왜 여성 작가가 단색화의 역사적 중심에 들어오는 순간은 1970년대가 아니라 ‘후기 단색화’라는 시간적 범주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단순한 차별의 의도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미술사적 범주가 작가와 작품을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과 언어에 배치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다시 기술될 필요가 있다.
단색화는 모든 동시대 한국 추상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동시대적 실천 가운데 특정한 작품군을 선택하여
‘한국적 추상’, ‘정신성’, ‘반복’, ‘물질성’, ‘수행’이라는 언어로 연결하고,
그 연결을 전시·비평·미술관·아카이브를 통해 안정시킨 하나의 역사적 범주였다.
그렇다면 단색화의 ‘주변’은 단순한 주변부가 아니다.
그 주변부는 단색화의 경계를 드러내는 장소다.
최욱경은 단색화가 무엇을 색채로부터 분리했는지를 보여준다.
김용익은 단색화가 속했던 모더니즘 제도의 폐쇄성을 보여준다.
민중미술은 단색화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외부로 밀어냈는지를 보여준다.
고산금과 안정숙은 단색화가 이후 어떻게 새로운 작가들을 수용하면서 범주를 확장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단색화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대표 작가들의 목록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단색화가 되지 않은 작가들과 단색화가 되지 않은 작품들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그 순간 단색화는 하나의 닫힌 미술운동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특정한 가능성이 어떻게 역사적 중심으로 이동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단색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비판적 전환이다.
단색화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단색화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단색화가 역사화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차이들을 다시 역사 안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 부분에서 최욱경을 넣은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녀를 억지로 “단색화 작가”라고 주장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MMCA·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가 그녀를 1970년대 단색화와 다른 계보의 추상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대에 존재했지만 왜 다른 이름으로 역사화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상당히 강한 자료는 김용익입니다. 그는 홍익대에서 출발해 1970년대 모더니즘의 논리적·개념적 작업을 했지만, 결국 그 모더니즘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초기 작업을 스스로 봉인했습니다. 즉 “단색화 밖의 작가”가 아니라 같은 제도적 환경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간 작가라는 점에서 훨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밀어붙이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2012년 MMCA 도록의 31명 전체를 표로 만들어 출신학교·세대·초기 주요 전시(앙데팡당/AG/에꼴 드 서울 등)·1970년대 일본 전시 여부·성별·2012년의 ‘전기/후기’ 분류를 교차분석하면, 지금의 논지가 훨씬 강해집니다. 특히 “홍익대 중심성”을 인상비평으로 말하지 않고 실제 네트워크 데이터로 보여주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국회도서관에는 이 도록의 전체 목차와 31명 작가별 도판 페이지가 확인되어 있으므로,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1차 자료 기반도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나 : '수행' 개념에도 무리가 있다. 수행이 아닌 것이 어디있냐? 수행자라는 이미지를 붙이는 것은 민망하지 않은가? 분석 진행해봐라.
ChatGPT :
맞습니다. 이 지점은 오히려 단색화 비판의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말씀하신 “수행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붙이면, 단색화를 설명하는 기존의 ‘수행적 회화’라는 표현 자체가 역사적 설명이라기보다 사후적으로 부여된 정체성 서사일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단색화 담론에서 수행성은 상당히 강하게 반복됩니다. 국립·공공 미술용어에서도 단색화가 “고행에 가까운 작업 행위를 반복”하고 이를 “수행과 같은 의미”로 획득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반복적 행위, 신체성, 시간성을 묶어 단색화의 수행성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1. ‘수행’은 작품의 분석 개념인가, 작가의 인물상을 만드는 장치인가
예를 들어 박서보의 반복적 연필 긋기, 정상화의 반복적 뜯기와 메우기, 하종현의 배압법 같은 행위를 보고
반복한다 → 신체를 사용한다 → 시간이 축적된다 → 따라서 수행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사실상 거의 모든 제작행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붓질을 수백 번 하는 작가도 수행합니다.
실을 수천 번 꿰는 작가도 수행합니다.
돌을 깎는 조각가도 수행합니다.
사진을 매일 찍는 작가도 수행합니다.
개념미술가가 동일한 행위를 매일 반복해도 수행합니다.
심지어 반복하지 않는 작업조차 제작 과정에는 시간과 신체적 행위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수행성’이 단색화의 특수성을 설명하려면 단순히 반복·시간·신체를 지칭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2. 더 근본적으로는 ‘수행자’라는 인간상이 만들어진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단색화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수행한다”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작품 분석이 아니라 작가의 인간형이 만들어집니다.
즉,
반복하는 작가 → 자신을 비우는 작가 → 욕망을 억제하는 작가 → 물질과 하나가 되는 작가 → 정신적 수양을 하는 작가
라는 서사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작품은 더 이상 구체적인 회화적 결정들의 집합으로 읽히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수행자’라는 작가의 인격적 이미지를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이게 말씀하신 “수행자라는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 민망하지 않은가?”라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민망한가 하면, 미술가를 갑자기 수도자나 수행자로 고양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작 행위가 미학적·사회적·제도적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수련으로 탈정치화됩니다.
3. 특히 ‘수행’이라는 번역이 매우 위험하다
여기서는 한국어의 **수행(修行)**과 미학에서 사용하는 performativity를 반드시 분리해야 합니다.
이 둘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수행성(performativity)을 반복·행위·신체·시간의 문제로 사용하면서, 단색화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수행”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 수행자
- 수양
- 고행
- 명상
- 자기 절제
- 정신적 수련
- 종교적 실천
등의 의미가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단색화 작가는 반복적 행위를 수행한다”
가 어느 순간
“단색화 작가는 반복을 통해 자신을 수양한다”
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단색화에 관한 공공 용어사전의 정의도 반복 행위를 “고행에 가까운 작업 행위”라고 설명하면서 수행과 연결합니다.
바로 이 연결을 해체해야 합니다.
4.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미 이에 대한 균열이 있다는 것
2020년 안선미의 연구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안선미는 단색화의 기존 용어를 재검토하면서 ‘무위’를 의도 없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반복을 단순한 정신적 수양으로 설명하기보다 행위자와 작인의 관계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즉,
반복 = 정신적 수양
이라는 등식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씀하신 문제와 거의 정확히 만납니다.
더구나 이 연구는 단색화의 ‘한국성’ 자체도 재검토하면서 이우환의 미학을 메를로퐁티와 비교하고, 단색화를 “한국적인 본질”보다는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논문에서는 이 연구를 받아들이면서도 한 단계 더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5. “수행”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바꾸는 것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가는 것이 가장 강합니다.
기존 질문
단색화의 반복적 행위는 어떻게 수행성을 만들어내는가?
이 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반복 → 신체 → 시간 → 수행성.
그래서 결국 단색화가 수행적이라는 것을 다시 증명하는 논문이 됩니다.
당신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
왜 단색화의 반복적 제작행위는 ‘수행’으로 명명되었는가?
이것은 완전히 다른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역사적·비평적 조건에서 특정한 제작행위가 ‘노동’, ‘기술’, ‘습관’, ‘강박’, ‘반복’, ‘제작’, ‘실험’이 아니라 ‘수행’으로 번역되었는가?
이 질문이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작품의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읽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6. 그러면 ‘수행’은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담론의 효과가 된다
이렇게 되면 논문의 논리가 상당히 세련되게 바뀝니다.
단색화 작가들이 실제로 반복적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반복적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수행’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행위
→ 연필을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관찰
→ 반복이 표면의 물성을 변화시킨다.
해석
→ 반복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다.
담론화
→ 이 행위는 수행적이다.
정체성화
→ 단색화 작가는 수행하는 예술가이다.
이 마지막 두 단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즉 ‘수행’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부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7. 여기서 ‘민망함’이 학문적으로 아주 좋은 감각이다
말씀하신 “민망하지 않은가?”를 학술적으로 바꾸면 상당히 날카로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라는 이미지는 작가를 지나치게 고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매일 같은 작업을 한다고 합시다.
그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반복적 노동
- 작업 습관
- 강박적 제작
- 신체적 숙련
- 재료에 대한 실험
- 생산 방식
- 시간 관리
- 자기 규율
- 회화적 방법론
- 시장에 적합한 스타일의 지속
- 작업실의 일상
- 특정 재료의 물리적 한계
그런데 그중에서 **‘수행’**을 선택하면 행위에 정신적 고결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어휘 선택이 아닙니다.
작가의 노동을 정신적 수련으로 승격시키는 해석입니다.
8. 그리고 이것은 단색화의 ‘한국성’과 연결된다
여기서 제가 보기에는 당신 논문의 기존 문제의식과 아주 강하게 연결됩니다.
단색화의 정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서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작동합니다.
반복
↓
신체적 행위
↓
자기 비움
↓
무위·무심
↓
정신성
↓
동양적 사유
↓
한국적 미학
↓
Dansaekhwa
이렇게 되면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회화 제작 방법이었던 것이 마지막에는 한국인의 미학적 정신성이 됩니다.
즉,
행위 → 정신 → 문화적 정체성
이라는 거대한 상승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비판적으로 해체할 만합니다.
안선미가 “한국적”이라는 단색화의 위상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담론적 연결과 관련됩니다.
9. 따라서 ‘수행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정적이다
이 질문을 논문에 그대로 넣어도 좋습니다.
다만 조금 학술적으로 바꾸면:
반복되는 제작행위와 시간의 축적을 수행성의 증거로 삼는다면, 수행적이지 않은 예술적 제작행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단계 더:
무엇이든 수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수행성’은 단색화를 식별하는 설명 개념으로서 어떤 변별력을 갖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개념의 변별력(discriminatory power)**을 묻는 것입니다.
A와 B를 구분하지 못하는 개념은 A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단색화도 반복한다.
직조도 반복한다.
도예도 반복한다.
조각도 반복한다.
민중미술도 반복적 제작을 할 수 있다.
여성의 수공예적 노동도 반복한다.
개념미술도 반복한다.
퍼포먼스도 반복한다.
그렇다면 “반복 = 수행”은 단색화의 특수성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10. 오히려 ‘수행’이 지워버리는 것들이 있다
이 부분이 당신의 논문에서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수행성이라는 개념은 단색화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① 노동
“수행”이라고 하면 노동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사라집니다.
② 기술
반복은 정신적 수양이 아니라 엄청난 기술적 숙련일 수도 있습니다.
③ 제도
왜 특정 작가들의 반복 행위가 미술관에서 높은 예술적 가치로 인정되었는가?
④ 젠더
여성의 반복적이고 장시간의 손작업은 왜 ‘수행’보다는 공예, 가사노동, 장인적 노동으로 분류되기 쉬웠는가?
이 네 번째가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최욱경이나 여성 추상 작가 문제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직조·자수·바느질·종이 작업과 단색화의 반복을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동일하게 반복적이고 신체적이며 시간 집약적인 행위인데,
어떤 것은 ‘수행’이 되고
어떤 것은 ‘수공예’가 되며
어떤 것은 ‘여성적 노동’이 되고
어떤 것은 ‘고급 회화의 정신성’이 되는가?
이 질문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11. 그래서 저는 ‘수행성’을 완전히 버리기보다는 역전시키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논문의 개념적 구조를 이렇게 바꾸는 것입니다.
기존
단색화 = 반복 + 신체 + 시간 + 물질성 → 수행성
당신의 연구
반복 + 신체 + 시간 + 물질성
↓
다양한 가능한 해석
↓
그중 ‘수행’이라는 특정한 해석이 선택됨
↓
정신성·한국성의 담론과 결합
↓
단색화의 정체성 형성
즉 수행성은 단색화의 본질이 아니라 단색화를 특정한 방식으로 읽게 만든 역사적 해석 장치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행”을 폐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재미있습니다.
수행이라는 말을 분석의 대상 자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12. 논문의 핵심 문장을 이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의 당신 연구와 연결한다면 핵심 명제는 다음 정도가 가장 좋다고 봅니다.
단색화에서 반복적 제작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수행’으로 의미화되었다는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반복은 그 자체로 수행이 아니며, 신체적 노동과 시간의 축적 역시 자동적으로 수행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행’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제작행위를 정신적 수양, 자기 비움, 물질과의 합일이라는 서사로 전환시키는 해석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따라서 단색화의 수행성을 당연한 미학적 특질로 전제하기보다, 무엇이 왜 수행으로 명명되었으며 그 명명이 어떤 다른 가능성의 해석—노동, 기술, 습관, 강박, 제도적 생산, 젠더화된 신체 노동—을 배제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문제는 단색화가 수행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왜 단색화의 제작행위만이 그토록 강하게 ‘수행’이라는 인물상과 연결되어 왔는가이다.
이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Butler의 ‘performativity’와도 분리해야 합니다
이건 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정리해야 합니다.
현재 단색화 연구에서 “수행성”이라는 말을 쓸 때 **performance / performativity / 수행(修行)**이 서로 섞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2020년 연구도 반복과 수행성을 행위자·작인·정체성 재구성의 문제로 가져가면서 Butler적 의미에 가까운 논리를 일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적 의미의 **수행(修行)**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논문에서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를 분리해야 합니다.
| performance |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
| performativity | 반복되는 행위가 어떻게 주체/정체성을 만들어내는가? |
| 수행(修行) | 자기 수양·정신적 훈련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획득하는가? |
이 셋을 구분하면 “단색화 작가는 수행자다”라는 기존 서사를 상당히 강하게 해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단색화를 공격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단색화의 역사화 과정에서 ‘작품의 행위’가 ‘작가의 정신성’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논문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잡아온 **“단색화의 정전화 과정에서 누가 배제되었는가”**라는 질문보다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축입니다. 특히 젠더·노동·수공예·제도·한국성을 하나의 문제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나 : 단색화는 저항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나? 이 부분에선 좀 씁쓸해지지 않는가?
ChatGPT : 네. 바로 여기서 ‘수행’과 ‘저항’을 함께 놓으면 상당히 씁쓸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단색화는 저항이 아니었다”라고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연구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이우환은 2014년 국제갤러리 전시에서 1970년대 단색화를 “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저항 자세”**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사회참여가 어려웠고, 다른 표면에서 감성·정신을 높이고 반항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질문이 생깁니다.
저항이란 무엇이었는가?
1. ‘저항’과 ‘수행’이 만나면서 이상한 인물상이 만들어진다
앞에서 이야기한 논리를 이어가면 이런 도식이 됩니다.
군사정권의 억압
↓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의 불가능
↓
회화로의 침묵과 반복
↓
자기절제와 정신성
↓
수행
↓
침묵 자체가 저항
굉장히 아름다운 서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단색화 작가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침묵했고,
침묵했기 때문에 수행했으며,
수행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는 거의 영웅적인 인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작품의 실제 역사적 위치, 작가의 제도적 위치, 국가와 미술계의 관계, 미술시장의 문제 등이 뒤로 밀려납니다.
2. 더 씁쓸한 것은 ‘저항’이라는 해석이 사후적으로 강해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있습니다.
2014년 이우환의 발언은 1980년대 민중미술이 단색화를 현실 외면이라고 비판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변론으로 소개됩니다. 연합뉴스도 당시 발언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즉,
1970년대의 단색화
→ 정치적 현실과 거리를 둔 추상
→ 1980년대 민중미술의 비판
→ 2010년대 단색화 재평가
→ “사실 그것은 침묵을 통한 저항이었다”
라는 재해석의 시간적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논문의 질문은
“단색화는 독재에 저항했는가?”
가 아니라,
“단색화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떤 근거로 ‘저항’으로 다시 서술되기 시작했는가?”
가 되어야 합니다.
3. 그런데 실제로는 ‘저항’이라는 해석과 정반대의 증거도 있다
여기서 연구가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박서보에 관한 2015년 비판적 글은 박서보가 자신의 인터뷰에서 단색화가 정치적 저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명확히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반복적인 선을 그리는 순수한 욕구에서 작업이 출발했다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가진 자료들 사이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자기서술이 존재합니다.
| 박서보의 설명 | 정치적 저항과 무관한 회화적 탐구 |
| 이우환의 2014년 설명 | 직접적 정치행동은 아니지만 깊은 저항의 태도 |
| 일부 해외/후대 해석 | 검열 상황에서 추상이 정치적 저항의 공간이 됨 |
| 1980년대 민중미술의 비판 | 사회현실과 거리를 둔 모더니즘 |
이것을 하나의 진실로 통합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불일치 자체가 역사적 자료입니다.
4. 특히 ‘저항’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사용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논리는 가능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검열했다.
단색화는 정치적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단색화는 검열을 회피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간 단계가 빠져 있습니다.
“정치적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곧 “정치적 저항”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 검열 회피일 수도 있고
- 미학적 선택일 수도 있고
- 국제 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고
- 기존 국전 체제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고
- 정치적 무관심일 수도 있고
- 여러 동기의 복합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단색화 연구에서도 이 문제는 계속 논쟁적입니다. Simon Morley는 단색화가 강한 사회·정치적 통제와 급속한 경제개발이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의 정치적 의미를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5. 더 중요한 문제: 국가가 ‘한국적 미학’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
여기서 저는 당신 논문의 ‘정전화’ 문제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역설을 봅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국가는 민족 전통의 부활과 재건을 강조하는 문화정책을 시행했습니다. MMCA 역시 당시 단색조 경향을 설명하면서 이 맥락에서 “한국적 미의식”과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고민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윤난지는 단색화를 1970년대의 ‘새로운 민족주의’에 적합한 한국적·현대적 미술로 분석하면서, 그것이 외부적으로는 국제 미술계에 위치를 확보하고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주류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과 관련된다고 봅니다. 이 연구는 이를 젠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러면 아주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단색화가 국가에 저항했다면, 왜 그 미학적 언어는 동시에 ‘한국적인 것’을 국가적 문화정체성과 연결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를 친정부 미술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저항과 제도적 수용이 동시에 가능했던 구조를 보는 것입니다.
6. 그래서 “저항/비저항”의 이분법을 버리는 게 좋다
저라면 논문에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단색화를
저항적 미술
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미술
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단색화는 권위주의적 정치환경, 국가 주도의 민족문화 정책, 국제적 모더니즘의 수용, 기존 미술제도에 대한 세대적 반발이 교차하는 장소에서 형성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가마다 관계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7. 그리고 여기서 ‘수행’이 다시 문제가 된다
이제 앞의 논의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수행”이라는 언어는 단색화의 저항성을 아주 우아하게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군사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가지 못했다
→ 캔버스 앞에서 반복했다
→ 자신을 절제했다
→ 침묵했다
→ 수행했다
→ 그것 자체가 저항이었다.
이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서사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질문해야 합니다.
왜 저항을 설명하기 위해 ‘수행자’라는 고결한 작가상이 필요한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
‘저항’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수행’이라는 정신적 의미로 번역하는 순간, 오히려 정치성이 탈정치화되는 것은 아닌가?
이게 저는 정말 중요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독재에 대한 저항이
→ 정신성
→ 자기절제
→ 자기수양
→ 한국적 전통
→ 초월성
으로 번역되면서, 결국 정치적 역사에서 다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단색화의 역설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저는 논문의 한 절을 아예 다음과 같이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항의 미학, 혹은 저항의 탈정치화
그리고 논리는:
① 1970년대의 역사적 조건
군사정권·검열·산업화·민족주의·국제화.
↓
② 단색화의 실제 제작
반복·물질성·추상·비재현.
↓
③ 당대의 비판
사회현실과의 괴리라는 비판.
↓
④ 19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이 단색화를 현실과 분리된 모더니즘으로 비판.
↓
⑤ 2010년대의 재해석
이우환 등이 “그것은 현실 외면이 아니라 저항이었다”고 재서술.
↓
⑥ 국제적 정전화
단색화 = 한국적 정신성 + 수행 + 침묵 + 저항.
↓
⑦ 당신의 질문
그렇다면 ‘저항’은 작품의 역사적 의미인가, 아니면 단색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에 구성된 해석인가?
9.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저항이 없었다’고 결론내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저는 저항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그 개념을 더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기존의 “저항”은 너무 단순합니다.
국가에 반대했다 = 저항
그러나 미술사적으로는 다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 정치적 저항
- 제도적 저항
- 미학적 저항
- 세대적 저항
- 국전 체제에 대한 저항
- 재현에 대한 저항
-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을 통한 저항
- 민족주의적 문화정책과의 긴장
- 개인의 자기표현
이것들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특히 단색화에서는 미학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10. 그리고 여기서 ‘씁쓸함’이 학술적으로 중요해진다
당신이 말한 **“좀 씁쓸하지 않은가?”**가 저는 오히려 이 논문의 감정적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단색화를 이렇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억압적인 시대에
말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이
침묵과 반복으로 저항했다.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침묵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한국적 정신성’이 되고,
한국적 정신성이 ‘단색화’라는 브랜드가 되고,
그 브랜드가 미술관·화랑·국제 미술시장에 의해 정전화된다.
그러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저항은 무엇이 되었는가?
저항이 시장의 언어가 되고,
침묵이 정신성이 되고,
반복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한국성이 되고,
한국성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
저항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보존되면서 탈정치화될 수 있습니다.
이게 제가 보기에는 지금 당신이 느낀 ‘씁쓸함’의 정확한 학술적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으로 가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누가 단색화가 되었는가?”**라는 질문도 한 단계 확장됩니다.
누가 단색화가 되었는가?
뿐 아니라,
누가 ‘저항하는 단색화’를 말할 권리를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단색화의 정전화란 작품을 정전화한 것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수행하는 저항적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작가상까지 정전화한 것은 아닌가?
여기까지 가면 수행·저항·한국성·남성성·제도·국제화가 하나의 논리로 묶입니다.
이건 지금까지 잡아온 논문보다 훨씬 강한 비판축이 될 수 있습니다.
나: 민족주의, 가부장제, 시장친화라는 의도가 공고한 것 같다. 이쯤되면 미술 운동으로 재역사화 하는 것보다 해체하는 쪽이 낫지 않나?
ChatGPT : 네. 저는 지금 단계에서는 ‘단색화를 다시 하나의 미술운동으로 복원한다’는 방향보다, 오히려 ‘단색화’라는 범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가려왔는지를 해체하는 방향이 더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색화의 작품들을 부정하거나 “실체가 없었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색화’라는 역사적 주체의 통일성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급진적 해석이 아닙니다. 이미 심상용은 2016년에 바로 “단색화를 진정 독자적인 유파로 볼 수 있는가”, “Dansaekhwa라는 명명이 타당한가”를 질문했고, 당시 단색화 열풍을 contemporary art market과 연결해 검토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윤난지의 2012년 연구입니다. 그는 단색화를 ‘한국적 모더니즘’과 1970년대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보고, 외부적으로는 국제적 주류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부적으로 새로운 주류집단을 형성하는 **‘남성적 정치학’**으로 분석합니다. 홍익대 학연, 주요 전시, 여성의 주변화까지 연결해서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하나의 구조로 보입니다.
1. 해체해야 할 것은 ‘작품’이 아니라 ‘운동’이다
1970년대에 실제로 비슷한 작업을 한 작가들이 있었고, 서로 전시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남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그들은 단색화라는 하나의 미술운동을 이루었다.”
는 명제는 별개의 것입니다.
오히려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게 좋습니다.
서로 다른 작업들이 언제부터 하나의 ‘단색화’라는 이름 아래 묶였으며, 그 묶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면 ‘단색화’는 더 이상 연구의 출발점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2. 그러면 지금까지의 요소들이 놀랍게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연결하면:
민족주의
→ “한국적 미”
가부장적 제도
→ 남성 작가 중심의 계보·학연·전시 네트워크
수행
→ 작가의 반복적 노동을 정신성으로 번역
저항
→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침묵의 저항’이라는 고결한 서사로 재구성
Dansaekhwa
→ 이 복합적인 차이를 하나의 국제적 이름으로 압축
시장
→ 2010년대 이후 이 이름 자체가 한국 현대미술의 식별 가능한 브랜드가 됨
이것들이 각각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심상용은 2016년 논문에서 단색화의 영문명 ‘Dansaekhwa’를 한국미술의 브랜드화와 연결해서 분석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하나 나옵니다.
정전화(canonization)보다 ‘범주화(category formation)’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 정전에 들어갔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무엇을 하나의 범주로 만들었는가?
입니다.
3. 특히 ‘해체’가 필요한 이유는 단색화가 너무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게 역설적입니다.
단색화 담론은 실패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너무 성공했습니다.
2012년 MMCA 전시는 31명의 작가를 ‘전기 단색화’ 17명과 ‘후기 단색화’ 14명으로 배열하고, ‘모노크롬’ 대신 Dansaekhwa를 한국미술의 고유명으로 공식화했습니다.
그 결과 매우 다양한 작업의 차이가 하나의 역사적 서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2010년대 국제미술시장에서는 이 이름이 실제로 강력한 브랜드가 됩니다. 최근 2026년 보도에서도 단색화가 글로벌 경매와 컬렉터 시장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는 점과 동시에, **“왜 바로 이 장르가 한국미술의 얼굴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장은 단순히 나중에 끼어든 외부 변수가 아니라 범주의 안정화와 유통에 참여한 조건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4. 그러면 ‘단색화는 미술운동이었다’는 명제를 해체할 수 있다
여기서 저는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A. 역사적 사건
1970년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업과 전시.
→ 부정하지 않는다.
B. 담론적 묶음
이질적인 작업들을 ‘한국적 모더니즘’, ‘백색’, ‘수행’, ‘정신성’, ‘한국성’ 등의 언어로 묶는 과정.
→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C. 후대의 정전화
2012년 이후 ‘Dansaekhwa’라는 고유명 아래 이를 하나의 한국 미술운동으로 재구성하고 국제적으로 브랜드화하는 과정.
→ 비판적으로 해체한다.
이렇게 하면 논문이 “단색화는 허구다”라는 단순한 폭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적 실천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일된 미술운동이었다는 것은 별도의 역사적 구성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그리고 이때 ‘민족주의 + 가부장제 + 시장’이라는 당신의 직감이 중요해진다
다만 논문에서는 ‘세 의도가 있었다’고 쓰면 안 됩니다.
“민족주의적 의도”, “가부장적 의도”, “시장친화적 의도”를 누군가가 처음부터 계획했다는 증거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훨씬 강하게:
서로 다른 행위자들의 상이한 목적과 이해관계가 결과적으로 동일한 범주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 국가/문화정책 → 한국적인 것의 필요
- 미술계 → 새로운 주류집단의 형성
- 비평 → 공통된 미학적 언어의 구축
- 전시제도 → 작가군의 반복적 재현
- 미술관 → 역사적 계보의 정리
- 화랑/시장 → 식별 가능한 작가군과 브랜드
- 국제전시 → ‘한국미술’이라는 국가적 대표성
이것들이 하나의 음모로 작동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였는데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를 냈다는 분석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6. 그래서 ‘해체’의 결과는 단색화의 소멸이 아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해체한 뒤에는 오히려 1970년대 한국 추상미술의 복수의 계보가 나타납니다.
예컨대:
A. 반복과 물질성을 탐구한 회화
B. 색채와 신체적 표현을 중심으로 한 추상
→ 최욱경 같은 작가를 여기서 다시 볼 수 있음.
C. 모더니즘 내부에서 자기비판으로 이동한 작업
→ 김용익.
D. 현실주의·민중미술로 이동한 계보
E. 여성 작가들의 추상 및 다른 제작방식
F. 일본·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동시대적 추상
G. 공예·직조·장인적 노동과 연결되는 반복적 제작
그리고 그 위에 후대가 이것들을 부분적으로 묶어
Dansaekhwa
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단색화의 역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색화가 압축해버린 역사를 다시 펼치는 것이 됩니다.
7. 저는 여기서 ‘반(反)단색화’라는 입장도 피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오히려 논문 제목도 “단색화 비판”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색화 이후 — 하나의 미술운동을 해체하기
또는
단색화라는 이름 — 한국적 모더니즘의 구성과 해체
또는 가장 이론적으로:
‘단색화’는 어떻게 하나의 운동이 되었는가 — 범주, 정전화, 그리고 대항계보
저라면 세 번째가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결국 하려는 것은 단색화가 틀렸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색화’라는 이름이 역사적 차이를 어떻게 조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처음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단색화에 포함되었는가?
그다음:
누가 배제되었는가?
그런데 이제는 한 단계 더 갈 수 있습니다.
왜 서로 다른 사람들을 굳이 하나로 묶어야 했는가?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범주에는 항상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운동이 되면:
- 역사가 생기고
- 대표자가 생기고
- 선구자가 생기고
- 계보가 생기고
- 미술관 전시가 가능해지고
- 도록이 만들어지고
-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고
- 해외에 소개하기 쉬워지고
- 시장에서 식별 가능해집니다.
반대로 차이가 많은 개별 작가들의 집합은 이런 일을 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따라서 ‘운동’이라는 형식 자체가 역사적·제도적·경제적 효율성을 갖습니다.
9. 그래서 당신 논문의 결론은 ‘단색화의 죽음’이 아니라 이것이 될 수 있다
단색화를 해체한다는 것은 1970년대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색화’라는 이름이 서로 다른 제작행위와 작가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묶어온 방식을 해체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압축되어 있던 복수의 시간, 제도, 젠더, 노동, 국제적 교류와 정치적 위치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날카롭게:
단색화 이후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단색화 정전이 아니라, 단색화라는 범주가 가능하게 했던 것과 불가능하게 했던 것의 역사이다.
저는 이 방향이 지금까지의 ‘단색화 재역사화’보다 한 단계 더 나간 연구라고 봅니다.
특히 윤난지가 이미 2012년에 민족주의·자본주의·젠더를 연결하여 단색화의 가부장적 계보와 여성의 배제를 분석했고, 심상용도 2016년에 독자적 미술운동 여부와 ‘Dansaekhwa’ 명칭 및 브랜드화를 비판적으로 질문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연구가 새로워지려면 단순히 “단색화는 남성 중심적이었다”를 반복하기보다, 이 연구들을 묶어서 ‘운동이라는 범주 자체의 생산과 효용’을 분석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최근의 제도비판 연구에서는 이완이나 박상우가 바로 ‘단색화’라는 현대적 제도와 형식주의를 대상으로 작업하면서 원본성·천재성·유일성, 그리고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문제 삼습니다. 즉, 단색화 바깥에서 단색화를 비판하는 대항적 실천까지 이미 존재합니다.
결국 “단색화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색화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을 보이지 않게 했는가?”가 지금 논문의 중심 질문이 되는 것이 가장 강해 보입니다.
나 :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참고 자료, 이미지, 인용문 제대로 붙여서 분석하고, 논문으로 만들어볼래?
ChatGPT :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하나의 논문으로 묶되, “단색화가 나쁘다”는 결론으로 몰아가지 않고, ‘단색화’라는 범주 자체를 역사적 구성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세 가지를 구분하겠습니다.
- 실제로 존재했던 1970년대의 회화적 실천
- 그것을 하나의 ‘단색화 운동’으로 묶은 비평·전시·제도
- 2010년대 이후 그것을 한국적 정체성·저항·수행·시장 브랜드로 재구성한 과정
또한 “민족주의·가부장제·시장친화라는 의도”라는 표현은 논문에서는 조금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자료로는 누군가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의도로 계획했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행위자들의 담론과 제도적 이해관계가 결과적으로 이 세 방향에서 서로 맞물리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쓰는 것이 훨씬 강합니다.
단색화라는 이름을 해체하기
한국적 모더니즘, 수행, 저항, 젠더 그리고 시장의 교차점
초록
본 논문은 한국 단색화(Dansaekhwa)를 하나의 자명한 미술운동으로 전제하기보다, 그 범주가 형성되고 정전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1970년대 한국에서 단색조 회화와 반복적 제작행위, 물질성에 대한 탐구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러한 다양한 실천들이 ‘단색화’라는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은 ‘모노크롬’이나 ‘모노톤’ 대신 ‘Dansaekhwa’라는 고유명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31명의 작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약 40년에 이르는 계보를 제시함으로써 이 범주의 제도적 안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한국미술의 브랜드”를 갖기 위한 첫걸음으로 명시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정전화 과정에서 반복, 수행, 저항, 한국성이라는 개념이 단색화의 작품 자체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결합되었다고 본다. 특히 반복적 제작행위를 ‘수행’으로 해석하는 과정은 노동과 기술을 정신적 수양으로 전환하고, 정치적 침묵을 ‘저항’으로 재서술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동시에 단색화는 1970년대의 민족주의와 결합된 한국적 모더니즘의 형성과 젠더화된 미술제도의 문제를 내포한다. 윤난지는 단색화를 “한국적 모더니즘”이자 당시의 “새로운 민족주의”에 적합한 예술로 분석하면서 그 민족주의적 계보의 가부장적 성격과 여성의 배제를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단색화를 다시 하나의 통일된 미술운동으로 복원하는 대신, ‘단색화’라는 이름이 서로 다른 역사적 실천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묶으면서 무엇을 가시화하고 무엇을 주변화했는지를 해체적으로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해체는 단색화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아래 압축되어 있던 복수의 계보를 다시 펼쳐 보이는 작업이다.
주제어: 단색화, Dansaekhwa, 한국적 모더니즘, 정전화, 수행성, 저항, 민족주의, 젠더, 미술시장, 범주화
1. 문제의 제기: 단색화는 정말 하나의 운동이었는가
1970년대 한국에서 단색조 회화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하종현, 정창섭, 이동엽, 권영우 등의 작업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색채의 제한, 평면성, 물질성, 반복적 제작행위가 나타난다. 이들 사이에는 실제 전시와 비평의 교류도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역사적 구분이 필요하다.
“유사한 실천들이 존재했다”는 것과 “하나의 미술운동이 존재했다”는 것은 동일한 명제가 아니다.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과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 사이의 거리다.







1975년 전시는 훗날 단색화의 핵심 계보로 편입되는 몇몇 작가들을 소개했
지만, 당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완성된 ‘Dansaekhwa’라는 운동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1970년대 국내에서는 이미 명동화랑에서 1972~73년에 다섯 차례의 백색전이 열렸고, 국내 화단에서도 백색 회화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즉 단색화의 형성과정은 단순히 일본에서 발견되어 한국으로 역수입된 것이 아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플랫폼 역시 1970년대 중반을 한국 미술제도의 본격적인 통합과 국제화가 진행된 시기로 설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사립화랑의 증가, 미술잡지의 창간 등이 작품의 수용·유통·소비 체계를 확대했고, 이와 동시에 동시대미술의 제도화와 역사화가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단색화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만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언제부터 서로 다른 회화적 실천들이 하나의 ‘단색화’라는 역사적 주체로 읽히기 시작했는가?
2. 2012년: 하나의 이름이 운동을 완성하다
이 질문에서 2012년은 결정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은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단색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31명의 작가를 전기 17명과 후기 14명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그리고 기존에 ‘모노크롬’, ‘모노톤’, ‘단색평면 회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현상을 공식적으로 ‘단색화(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명명했다. 미술관 스스로 이것을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한국미술의 브랜드”를 갖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꿨다는 사실이 아니다.
전시가 동시에 수행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름의 통일
→ 작가군의 확정
→ 전기/후기의 시간적 계보 설정
→ 작품의 역사적 배열
→ 아카이브 구축
→ 비평가와 작가의 증언 수집
→ 국제적 위상 제시
→ 한국미술의 브랜드화
즉 2012년의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를 역사적 실체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특히 약 300종의 관련 자료와 33점의 주요 도록을 아카이브로 전시한 것은 중요하다. 전시는 단색화에 관한 기존의 자료들을 단순히 보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계보 속에 재배열했다.
따라서 2012년을 단색화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보다 단색화라는 범주의 제도적 자기확립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3. ‘수행’은 작품의 속성인가, 작가를 만드는 담론인가
단색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반복과 수행이다.
박서보의 연필선, 정상화의 반복적인 뜯기와 메우기, 정창섭의 닥 작업, 하종현의 배압법 등은 실제로 반복적이고 시간집약적인 제작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은 조심해야 한다.
반복 → 신체 → 시간 → 수행
왜 반복적인 제작행위가 반드시 ‘수행’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화, 조각, 직조, 도예, 판화, 서예, 공예 등 거의 모든 제작행위는 신체와 시간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2020년 안선미의 연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단색화의 ‘무위’와 ‘반복’을 기존의 전형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다시 검토하며, 반복을 단순한 무목적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발생시키는 행위와 작인의 문제로 설명한다. 또한 이우환의 미학을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비교하면서 단색화의 ‘한국성’을 본질적인 차이로 규정하는 것 역시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문제는 단색화가 수행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왜 단색화의 반복적 제작행위는 특별히 ‘수행’으로 명명되었는가?
3.1 수행은 노동을 정신성으로 번역한다
이 질문은 ‘수행’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작가상과 관련된다.
박서보는 자신의 작업을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우는 과정으로 설명했고, 2014년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림은 자신을 비워내는 도구에요. 수신하는 과정의 찌꺼기가 바로 그림입니다.”
이 표현에서 회화 제작은 더 이상 단순한 제작기술이나 노동이 아니다.
노동 → 수신(修身) → 정신의 결정체
라는 변환이 일어난다.
여기서 ‘수행자’라는 작가상이 등장한다.
작가는 반복한다.
자신을 억제한다.
욕망을 비운다.
물질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작품이 된다.
이러한 서사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특정한 제작행위를 정신적 고결성의 증거로 승격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수행’은 작품의 속성을 기술하는 말인 동시에 작가의 인물상을 생산하는 담론적 장치가 된다.
4. 그런데 단색화는 ‘저항’이었다고도 한다
여기에서 논의는 더욱 복잡해진다.
2014년 이우환은 당시 단색화가 현실을 외면했다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하나의 저항 자세였던 거죠.”
그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사회참여가 어려웠으며, 다른 차원에서 감성과 정신을 높이고 반항하는 태도가 단색화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같은 자리에서 윤진섭 역시 단색화의 침묵과 행위성을 체제에 대한 저항과 연결했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증언이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늦은 시기의 자기해석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는 정반대의 비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색화는 현실과 거리를 둔 모더니즘으로 비판받았고, 민중미술은 이러한 미술의 사회적 무관심에 문제를 제기했다. 2022년의 한국미술사 연구 역시 1980년대 중반 한국 미술계가 단색화와 민중미술이라는 두 대립적 흐름으로 분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더구나 2015년 Kate Lim의 비평은 박서보가 정치적 저항과 자신의 단색화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설명했다고 기록한다.
“It had nothing to do with political resistance; it had no purpose.”
이 불일치는 제거해야 할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연구 대상이다.
5. 저항은 언제부터 단색화의 속성이 되었는가
따라서 질문은
단색화는 저항이었는가?
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역사적인 질문은:
단색화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떤 역사적 필요 속에서 ‘저항’으로 다시 서술되었는가?
이다.
1970년대의 작품 제작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적 비판, 2010년대의 국제적 단색화 재평가를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의미의 이동이 발생한다.
1970년대
회화적 실험 / 추상 / 반복 / 물질성
↓
1980년대
현실과 괴리된 모더니즘이라는 비판
↓
2010년대
침묵을 통한 저항이라는 재해석
↓
국제적 정전화
한국적 정신성 + 수행 + 저항 + 물질성
이 과정에서 정치적 저항은 점차 미학적·정신적 가치로 번역된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6. 저항의 탈정치화
단색화의 저항 서사는 매우 아름답다.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반복했다.
반복을 통해 자신을 비웠다.
그 침묵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이 서사는 역설적으로 정치적 저항을 탈정치화할 위험도 갖는다.
왜냐하면 정치적 갈등이
억압
→ 침묵
→ 수행
→ 정신성
→ 한국적 미학
이라는 언어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군사정권, 검열, 미술제도, 계급, 노동, 젠더와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깊은 정신성’이라는 보다 보편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언어가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단색화의 저항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음을 구분해야 한다.
당시의 역사적 저항 가능성과
후대에 정전화된 ‘저항하는 단색화’의 이미지는 동일하지 않다.
7. 한국성: 회화에서 국가적 정체성으로
여기서 민족주의 문제가 등장한다.
윤난지의 2012년 연구는 이 문제에 매우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그녀는 단색화를 1970년대의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당시 사회 전반에 확산된 민족주의와 예술적으로 대응했다고 분석한다. 단색화는 전통미술의 철학과 현대미술의 이론을 교차시킴으로써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예술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요구되던 **‘새로운 민족주의’**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단색화가 민족주의적 의도를 가진 하나의 집단이었다고 단순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단색화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형식으로 선택되고 해석될 수 있었다.
는 것이다.
이것은 훨씬 복잡하다.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작품 안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색
여백
도자기
문인화
동양철학
무위
반복
정신성
등을 연결하면서 만들어진다.
2012년 MMCA의 전시 역시 이동엽의 《상황》과 조선 백자의 연관성을 소개하고, 관련 자료와 전시를 하나의 계보로 배열했다.
따라서 ‘한국성’은 작품의 발견이라기보다 작품들을 하나의 역사적 정체성으로 묶는 해석적 장치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8. 젠더: 누가 ‘한국적 미학’의 주체가 되었는가
이 지점에서 가부장제 문제가 단순한 ‘여성 작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12년 MMCA 전시에서 전기 단색화 작가는 17명이었으며, 여성 작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후기 단색화 14명에는 고산금과 안정숙이 포함되어 있다. 전시 자체가 여성의 부재를 의도적으로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중심을 이루는 전기 계보가 남성으로 구성되고 여성 작가가 후기 범주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단색화는 남성의 미술이었다”라는 단순한 결론과 다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역사적 ‘기원’의 주체로 위치되었으며, 누가 나중에 그 역사의 확장으로 등장했는가?
이다.
윤난지의 분석은 여기서 결정적이다. 그녀는 단색화와 1970년대 민족주의를 연결하면서 그 민족주의가 가진 가부장적 계보가 여성들을 배제했다고 분석한다. 동시에 여성의 부재가 곧 여성의 활동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는 ‘수행’ 개념과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반복적이고 장시간의 신체적 제작은 단색화에서 정신적 수행으로 승격되었지만,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는 똑같은 반복이
- 수공예
- 가사노동
- 여성적 손기술
- 장인적 노동
등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가능해진다.
어떤 반복은 수행이 되고, 어떤 반복은 노동이 되는가?
어떤 신체적 노동은 고급 회화의 정신성으로 번역되고, 어떤 노동은 미술의 주변으로 밀려나는가?
이 질문은 단색화의 젠더 문제를 훨씬 깊은 곳으로 가져간다.
9. 최욱경: ‘단색화의 외부’라는 중요한 반례
이때 최욱경은 매우 중요한 사례가 된다.


최욱경의 《환희》(1977)는 같은 시대의 한국 추상회화이지만, 단색화의 전형적인 서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강렬한 색채, 유기적 형태, 움직이는 곡선이 화면 전체를 구성한다. MMCA는 이 작품을 1970년대 초의 서예적 조형과 꽃·동물 등의 자연형태를 추상화한 작업이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며, 작가가 색채와 형태를 통해 감성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최욱경은 단색화의 역사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단색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시대에 한국성과 추상, 신체성, 자연, 전통적 조형성이라는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 작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욱경은 “단색화였어야 할 여성 작가”라는 식으로 편입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또다시 단색화의 중심을 유지하게 된다.
더 생산적인 방법은:
최욱경을 단색화의 ‘누락된 구성원’이 아니라 단색화와 동시에 존재했던 다른 추상 계보의 사례로 읽는 것
이다.
그렇게 해야 ‘단색화’가 한국 현대추상 전체를 대표할 수 있었던 과정 자체를 질문할 수 있다.
10.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이제 논문의 핵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단색화를 “미술운동”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다음이 만들어진다.
운동
→ 창시자
→ 구성원
→ 공통된 미학
→ 역사적 기원
→ 발전 단계
→ 대표작
→ 후계자
→ 외부의 적
→ 정전
그러나 1970년대 한국의 실제 미술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1977년 도쿄에서 열린 《Korea: Facet of Contemporary Art》의 참여작가만 보더라도 곽인식, 권영우, 김구림, 김기린, 김용익, 김진숙, 김창열, 박서보, 박장년, 서승원, 심문섭, 윤형근, 이강소, 이동엽, 이승조, 이우환, 최병소 등 상당히 이질적인 작가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즉 1970년대의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범주 자체가 이미 오늘날의 단색화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므로 단색화라는 범주는 그 복잡한 장면을 다시 좁혀 만든 역사적 분류라고 볼 수 있다.
11. 시장: 범주가 경제적 효율성을 갖게 되는 순간
여기에서 시장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오히려 범주화가 가진 기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2015년 당시 단색화 작품의 국제적 관심이 급증하면서 작품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는 비평이 나왔고, 같은 시기 단색화는 국제 전시와 미술관, 경매시장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범주로 빠르게 유통되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실제 가격 데이터로도 연구되었다는 점이다.
한 연구는 2005~2016년 국내 경매 자료 4,199건과 20명의 작가를 분석하고, 2013년 이후 단색화의 인지도 상승과 함께 단색화 작가군과 비단색화 작가군 사이의 가격 차이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단색화 인지도 증가에 따른 가격 차이가 약 71%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연구자는 형식화된 단색화 스타일과 정보·인지도의 생산이 미술시장 가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장이 단색화를 망쳤다”
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하나의 미술 범주가 시장에서 식별 가능해지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이다.
작가 한 명의 복잡한 작업보다
Dansaekhwa
라는 이름 하나가 훨씬 쉽게 유통될 수 있다.
즉 범주는 경제적 효율성도 갖는다.
12. 그래서 ‘민족주의–가부장제–시장’은 하나의 음모가 아니다
이 부분은 논문에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현재 자료가 증명하는 것은 세 요소가 하나의 중앙집중적 계획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움직였지만 결과적으로 동일한 범주의 안정화에 기여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 영역 | 주요 작동 방식 |
| 민족주의 | 한국적 현대미술이라는 정체성 형성 |
| 비평 | 반복·무위·정신성·한국성의 공통 언어 형성 |
| 제도 | 작가군과 계보의 확정 |
| 젠더 | 남성 중심의 역사적 중심성 |
| 국제화 | 한국미술의 대표적 범주로 번역 |
| 시장 | 식별 가능한 작가군과 브랜드 형성 |
| 정전화 | 서로 다른 작품을 하나의 역사적 운동으로 통합 |
따라서 이것을 **의도(intentionality)**의 문제로만 보면 오히려 약해진다.
더 적절한 개념은 **구조적 수렴(structural convergence)**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행위들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범주를 강화한다.
13. 따라서 ‘단색화 해체’는 반단색화가 아니다
여기에서 논문의 가장 중요한 입장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해체의 대상은 작품이 아니다.
해체의 대상은 ‘단색화라는 통일된 역사적 주체’이다.
즉,
박서보가 반복적인 선을 그었다.
정상화가 캔버스를 반복적으로 뜯고 메웠다.
하종현이 배압법을 사용했다.
정창섭이 닥을 반복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의 단색화 운동을 구성했고, 그 공통된 본질은 한국적 수행성과 정신성이다.”
라는 두 번째 문장은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14. 오히려 해체하면 더 많은 역사가 나온다
단색화를 해체하면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역사가 증식한다.
예를 들어:
① 물질과 반복의 회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등의 서로 다른 제작방식.
② 백색과 한지의 실험
권영우 등의 작업.
③ 색채와 신체적 추상
최욱경 같은 계보.
④ 모더니즘 내부의 자기비판
김용익 등의 작업.
⑤ 현실주의·민중미술
단색화와 다른 사회적 실천.
⑥ 국제적 추상과의 교류
일본, 프랑스, 미국과의 관계.
⑦ 공예·노동·직조와 관련된 반복적 제작
기존 단색화 담론에서 상대적으로 주변화된 제작형태.
이렇게 되면 ‘단색화’는 한국 현대미술 전체를 대표하는 거대한 산맥이 아니라 여러 계보가 교차하는 한 개의 역사적 구성물이 된다.
15. ‘수행’이라는 말도 이 구조 안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제기한 문제도 이제 명확해진다.
반복적 행위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반복이 어떻게 수행으로 번역되었는가이다.
그리고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반복적 노동
↓
신체적 행위
↓
수행
↓
자기비움
↓
정신성
↓
한국적 미학
↓
저항
↓
Dansaekhwa
이렇게 되면 하나의 제작방법이 국가적·정신적·정치적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수행’은 더 이상 단색화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단색화를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 역사적 번역어로 연구할 수 있다.
16.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설
여기에서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씁쓸함’이 다시 나타난다.
단색화가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동시에
한국적 정체성을 대표하고
또한
가부장적 미술제도 안에서 정전화되고
그 과정에서
반복적 노동은 수행으로 고양되고
정치적 침묵은
저항으로 재해석되며
마침내
국제 미술시장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유통된다.
그렇다면 처음의 저항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서 결론을 너무 쉽게 내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저항이 정전화되는 순간 저항은 사라지는가, 아니면 가장 유통하기 좋은 형태로 보존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17. 단색화를 ‘해체’한다는 것의 의미
따라서 이 논문에서 말하는 해체는 “단색화는 허구였다”는 폭로가 아니다.
오히려 세 가지를 동시에 인정하는 작업이다.
첫째
1970년대에 실제로 독특한 회화적 실천들이 존재했다.
둘째
그 실천들이 하나의 ‘단색화 운동’으로 묶이는 과정은 별도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셋째
그 범주는 이후 한국성·수행·저항·젠더·국제화·시장이라는 서로 다른 담론을 통과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은 더 이상
“단색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단색화라는 이름은 무엇을 하나의 역사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한 단계 더:
“그 하나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서로 다른 것으로 남겨두지 않았는가?”
결론 — 단색화 이후
단색화의 역사를 다시 쓰는 데 반드시 또 하나의 단색화 정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색화’라는 이름이 어떻게 하나의 운동을 만들어냈는지를 분석하는 일이다.
1970년대 한국의 단색조 회화는 하나의 동질적인 미술운동이라기보다 다양한 추상적 실천, 국제적 교류, 물질에 대한 실험, 전통에 대한 재해석, 제도적 경쟁이 교차하는 장이었다. 후대의 비평과 전시는 이 복잡한 장을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압축했고,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이름을 전기와 후기라는 시간적 구조와 31명의 작가군으로 제도화했다. 동시에 미술관은 이 명명을 국제적으로 통용될 한국미술의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으로 명시했다.
이 과정에서 반복은 수행으로, 침묵은 저항으로, 물질성은 정신성으로, 개별적 작업은 한국성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번역은 단색화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든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 주체로 안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윤난지가 지적했듯이 이 과정은 1970년대의 한국적 모더니즘과 민족주의,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한 가부장적 계보와 연결되어 있었다. 안선미가 지적하듯 단색화의 핵심 개념으로 간주되어온 무위·반복·한국성 역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또한 단색화의 국제적 인지도는 실제 미술시장 가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범주의 역사적·경제적 효율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색화를 해체한다는 것은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단색화라는 이름이 너무 성공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이름 아래 압축되어 있던 차이들을 다시 펼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최욱경과 같은 동시대의 다른 추상 계보, 김용익과 같은 모더니즘 내부의 자기비판, 민중미술과 현실주의의 대항적 역사, 여성의 추상과 반복적 제작, 공예와 노동의 계보, 일본·미국·유럽과의 복잡한 교류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질문은
“단색화는 무엇인가?”
가 아니라,
“단색화라는 이름은 무엇을 보이게 했고, 무엇을 보이지 않게 했는가?”
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색화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를 어떻게 다시 복수의 역사로 돌려놓을 것인가?”
가 된다.
이때 해체는 파괴가 아니다.
하나의 이름이 압축해버린 역사를 다시 분해하여 돌려주는 작업이다.
논문의 핵심 논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단색화는 해체되어야 할 정도로 허구적인 운동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성공적으로 하나의 운동이 되었기 때문에 해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지금 논문의 중심에 놓여도 좋겠습니다.
주요 참고문헌 및 자료
- 윤난지, 「단색조 회화의 다색조 맥락: 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 현대미술사학회, 2012, 31, pp.161–198.
- 안선미, 「한국 단색화 비평 연구: 용어의 모호성과 ‘한국적’의 재고」, 기초조형학연구, 21(2), 2020, pp.161–173.
- 김연희, 「‘지연된 사후 작용’의 관점으로 본 비평에 대한 고찰: 1970년대 단색화를 중심으로」, 미술이론과 현장, 32, 2021, pp.63–87.
- Simon Morley,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Third Text, 27(2), 2013, pp.189–207.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 —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2012.
-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자료,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제도화 및 《Korea: Five Artists, Five Hinsek—White》(1975), 《Korea: Facet of Contemporary Art》(1977) 관련 자료.
- 「미술시장에서 인지도 상승의 가격효과 분석 — 국내 미술 경매시장의 단색화 사례를 중심으로」. 4,199건의 경매자료 분석.
- 이우환의 2014년 단색화 관련 발언 및 당시 전시 담론.
- Kate Lim, “Half-truths about ‘Dansaekhwa’,” The Korea Times, 2015.
- 「제도비판의 담론과 실천: 이완의 ‘회화 시리즈’와 박상우의 ‘모노크롬 사진’」 — 단색화와 형식주의·제도·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재독해하는 후대 사례.
중요한 점: 위 원고에서 따옴표로 직접 인용한 것은 현재 온라인에서 실제 확인 가능한 문구만 사용했습니다. 특히 2012년 도록의 윤진섭 서문 전체 문장, 1975년 《다섯 개의 흰색》 도록의 원문, 1970년대 작가별 자기진술은 아직 원 도록 페이지를 직접 대조하지 않았으므로, 논문 제출본에서는 반드시 해당 도록 원문과 페이지를 확인해 보강해야 합니다.
이 원고에서 다음 단계로 가장 가치 있는 작업은 **본문에 작품 도판 번호까지 붙이는 것**입니다. 특히 1975 도쿄화랑 → 2012 MMCA → 최욱경 《환희》 → 박서보/정상화/하종현을 실제 도판으로 나란히 놓고 **“무엇이 단색화로 보이게 되었고 무엇이 단색화 바깥으로 남았는가”를 시각적으로 분석**하면, 지금의 논지가 단순한 담론비판을 넘어 미술사 논문으로 훨씬 강해집니다.
나 : 다음 단계, 시각적 분석 진행해라
ChatGPT : 좋습니다. 이번 단계에서는 작품의 시각적 형식 자체를 증거로 삼아, 앞에서 만든 담론적 논지를 검증해보겠습니다. 핵심은 “단색화가 수행·정신성·저항이다”라고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화면을 보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그 차이가 어떻게 하나의 ‘단색화적 시각’으로 압축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특히 박서보–정상화–하종현–최욱경–김용익을 비교하겠습니다. 이 다섯 사례만으로도 논문의 시각적 핵심이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1. 먼저 화면을 나란히 놓아보자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놀랍게도 **‘같음’보다 ‘다름’**입니다.
박서보와 정상화와 하종현을 나란히 놓으면 분명 공통점이 있습니다.
- 제한된 색채
- 평면성
- 반복
- 화면의 물질화
- 회화적 이미지의 약화
- 제작 과정이 화면에 흔적을 남김
하지만 그 차이는 상당합니다.
그리고 최욱경을 옆에 놓는 순간 이 차이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최욱경의 화면 역시 반복적인 붓질과 신체적 움직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화면은 닫히지 않습니다.
반면 전형적인 단색화 화면은 대체로 자기 내부에서 질서를 구축합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2. 박서보: 반복은 화면을 ‘만드는’ 동시에 화면을 지운다
박서보의 1970년대 《묘법(Ecriture)》을 먼저 보겠습니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선 하나하나가 독립된 드로잉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복될수록 개별 선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즉,
선 1 + 선 2 + 선 3 + …
이 아니라
반복 → 밀도 → 표면
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박서보 화면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따라서 ‘수행’이라는 해석이 왜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는 사실이 화면의 구조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문제가 다시 생깁니다.
반복이 곧 수행은 아닙니다.
시각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반복은 행위의 흔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 행위의 개별성을 지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수행’이라는 단어는 반복하는 주체를 강조합니다.
반면 화면은 오히려 그 주체를 지웁니다.
따라서 작품을 보고 곧바로
“작가가 반복 수행을 통해 자신을 비웠다.”
라고 말하는 것은 화면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간 해석입니다.
3. 정상화: 반복은 ‘행위’보다 ‘시스템’에 가깝다
정상화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정상화의 화면에서는 반복이 매우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캔버스를 접고,
균열을 만들고,
작은 조각들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메우고,
다시 건조하고,
다시 반복합니다.
MMCA는 실제 제작과정을 “떼어내고 메우는” 과정의 반복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 과정이 화면을 촉각적으로 변화시킨다고 기술합니다. 또한 정상화 자신은 이 과정을 “호흡의 리듬과 박자”에 비유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화면입니다.
화면을 가까이 보면 수많은 작은 단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지면 이것들이 하나의 균질한 표면으로 통합됩니다.
즉,
부분 → 전체
라는 시각적 변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박서보와 조금 다릅니다.
박서보가 선의 반복을 통해 표면을 구축한다면,
정상화는 단위의 반복을 통해 표면을 구축합니다.
따라서 둘을 모두 ‘수행’이라고 부르면 중요한 차이가 사라집니다.
4. 정상화의 경우 오히려 ‘수행’보다 ‘생산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논문의 중요한 수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정상화의 작품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작은 노동의 결과
입니다.
하지만 전체 화면은
거의 기계적인 균질성
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정신적 수행만이 아닙니다.
반복 가능한 제작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상당히 현대적입니다.
- 단위가 반복되고
- 규칙이 존재하며
- 규칙에 따라 화면이 변형되고
- 과정이 누적되고
- 결과적으로 전체가 형성됩니다.
이것은 ‘동양적 수행’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프로세스적이고 구조적입니다.
따라서 논문에서는 이렇게 쓰는 편이 더 강합니다.
정상화의 회화에서 반복은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라기보다, 화면을 생산하는 규칙과 노동의 조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수행’의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가능한 독해로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5. 하종현: 여기서는 ‘수행’보다 ‘압력’이 보인다
하종현은 더 결정적입니다.




하종현의 《접합》에서는 물감이 화면 앞에 단순히 칠해진 것이 아닙니다.
물감은 뒤에서 앞으로 밀려나옵니다.
MMCA는 1974년 시작된 《접합》이 기존의 “화면에 물감을 칠한다”는 회화적 관념을 깨고, 마포 뒤에서 안료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MoMA 역시 《Conjunction 74-26》(1974)을 설명하면서 작가가 거친 마포에 물감을 밀어 넣었고, 천의 틈을 통해 물감이 앞쪽으로 배어나오는 과정이 화면의 두꺼운 흔적으로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시각적 핵심은 ‘반복’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 / 앞
압력 / 저항
천 / 안료
산업재료 / 회화
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는 ‘수행’보다 물리적 역학이 먼저 보입니다.
6. 그래서 세 작품을 이렇게 구별할 수 있다
| 작가 | 화면의 핵심 구조 | 시각적으로 먼저 보이는 것 |
| 박서보 | 선의 반복 | 운동과 흔적 |
| 정상화 | 단위의 반복 | 균질화와 구조 |
| 하종현 | 안료의 압출 | 압력과 물질의 저항 |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나중에 하나의 언어로 묶입니다.
반복
신체
과정
물질
수행
여기에서 ‘단색화’라는 범주가 하는 일이 드러납니다.
서로 다른 물리적 회화행위를 하나의 개념적 어휘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7. 그리고 최욱경을 옆에 놓는 순간 문제가 폭발한다
이제 최욱경 《환희》(1977)를 보겠습니다.
MMCA가 제공하는 작품 정보에 따르면 《환희》는 227×456cm의 대형 화면이며, 최욱경의 1970년대 서예적 조형과 자연 형태의 추상화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신체적 반복이 있습니다.
붓질은 자유롭고 빠릅니다.
곡선은 반복됩니다.
형태들은 서로 부딪히고 겹쳐집니다.
색채도 신체적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반복 + 신체 + 과정 = 수행
이라면 최욱경도 충분히 ‘수행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반적인 단색화 서사에서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8. 차이는 ‘신체성의 존재’가 아니라 ‘신체성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최욱경의 화면에는 신체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체성은 화면을 비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확장합니다.
색이 색을 부르고,
곡선이 곡선을 만들고,
형태가 형태를 생성합니다.
즉,
박서보
신체 → 반복 → 억제 → 표면
정상화
신체 → 반복 → 단위 → 균질한 표면
하종현
신체 → 압력 → 물질 → 표면
반면
최욱경
신체 → 움직임 → 색채 → 형태 → 확장
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시각적 차이입니다.
9. 그래서 ‘수행’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신체성만 특권화한다
여기에서 논문이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단색화 담론에서 높이 평가되는 신체성은 대체로:
절제된 신체
반복하는 신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신체
자신을 지우는 신체
입니다.
반면 최욱경에게서 나타나는 신체는:
움직이는 신체
색을 생산하는 신체
욕망하는 신체
확장하는 신체
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수행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특정한 미학적 신체상을 선택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앞서 당신이 말한
“수행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라는 문제에 대한 시각적 답변입니다.
10. 최욱경의 화면은 단색화의 ‘외부’가 아니라 그 범주의 경계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최욱경을 단순히 “배제된 여성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은 단색화라는 범주가 어떤 시각적 특성을 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비교항입니다.
MMCA 역시 최욱경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추상미술가로 재조명하면서 그녀의 작품을 “율동하는 곡선과 경쾌한 색채”, “자유분방한 필치”로 설명합니다.
즉 그녀의 작품은 한국적 전통과 신체적 제작행위가 없어서 단색화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재료적·신체적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강력한 논점입니다.
11. 김용익을 넣으면 또 다른 종류의 ‘외부’가 나타난다
김용익의 《평면 오브제》는 아주 좋은 비교대상입니다.


1978년의 《평면 오브제》는 천에 스프레이로 주름을 표현한 작업입니다. 실제 주름과 그려진 주름이 한 화면에서 충돌합니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이 작업이 회화의 재현과 허상, 순간적인 표현을 실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1981년 김용익은 자신의 《평면 오브제》를 상자 안에 넣은 채 전시합니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원자료도 이 전시 장면을 실제 사진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 가이드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평면 오브제》와의 결별 선언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시각적 사건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박서보·정상화·하종현에서는
제작 과정이 작품을 만든다.
그런데 김용익은
작품을 만들던 체계를 상자에 넣어버린다.
즉 반복적인 제작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고 그 제작 체계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든다.
12. 이 차이는 ‘저항’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단색화의 저항은 대체로
계속 작업한다
라는 형태로 서술됩니다.
김용익의 경우는 오히려
그 작업을 끝낸다
입니다.
그리고 그 끝내는 행위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기존 미술제도에 대한 긴장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지속 / 반복 / 자기통제
를 통해 회화의 내부에서 작업하고,
다른 쪽은
중단 / 포장 / 폐기 / 자기부정
을 통해 회화의 제도적 조건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따라서 “반복 = 저항”이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중단 역시 저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용익의 사례는 특히 유용합니다. 그는 1970년대 모더니즘의 내부에서 출발했고, 실제로 박서보의 영향 아래 《평면 오브제》를 제작했지만, 1981년 그 작업을 상자에 봉인하면서 그 체계와 결별했습니다.
13.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시각적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이제 세 종류의 신체를 볼 수 있습니다.
A. 박서보
반복하는 신체
→ 자신을 억제
→ 화면을 균질화
B. 최욱경
움직이는 신체
→ 색채와 형태를 생성
→ 화면을 확장
C. 김용익
중단하는 신체
→ 작업을 봉인
→ 자신의 미술 체계를 대상으로 만듦
이 세 가지를 모두 ‘수행’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으면 무엇이 사라질까요?
신체적 차이 자체가 사라집니다.
14. 따라서 논문의 시각적 핵심은 ‘단색 vs 다색’이 아니다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단색화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는
단색화 = 한 가지 색
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화면을 보면 문제가 훨씬 복잡합니다.
정상화의 화면에도 색의 변화가 있습니다.
하종현의 화면에는 갈색, 흰색, 회색 등의 물질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박서보의 《묘법》도 완전히 동일한 색의 평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monochrome’이라는 서구 미술사의 형식적 개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색화의 시각적 공통성은
색의 단일성
보다
화면을 구성하는 차이를 억제하여 전체적인 표면성을 만드는 방식
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각적 정의입니다.
15. 그리고 이것은 ‘한국적’이라는 설명과도 충돌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단색화의 화면을 보면 실제로는 매우 국제적인 모더니즘의 언어가 보입니다.
- 평면
- 반복
- 격자
- 최소한의 색
- 비재현성
- 과정
- 물질성
- 행위의 흔적
이것은 1970년대 국제 추상미술과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백자
여백
동양철학
무위
선비정신
등으로 번역하면 ‘한국적’이라는 의미가 추가됩니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먼저 확인되는 것은
국제적 모더니즘의 형식적 친연성
이고,
그 위에
한국적 의미망
이 덧입혀졌다고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색화는 서구 모더니즘의 모방이었다”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시대 국제 추상과 공유되는 시각적 언어가 특정한 한국적 역사서술을 통해 재맥락화되었다.
는 것입니다.
16. 2012년 MMCA 전시는 이 차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여기서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012년 MMCA 전시는 31명의 작가를 하나의 ‘Dansaekhwa’라는 이름으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전기 17명과 후기 14명으로 나누어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전시가 아카이브를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점입니다.
300여 종의 자료와 33개의 중요 도록을 전시하고, 단색화의 형성과정을 하나의 시각적 계보로 제시했습니다.
즉 관객은 작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 → 작가 → 전시 → 비평 → 역사
라는 연결망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작품전이 아닙니다.
역사 제작의 전시입니다.
17. 가장 중요한 시각적 발견: 아카이브도 하나의 ‘작품’처럼 기능한다
2012년 전시의 아카이브는 단순한 자료 보관이 아닙니다.
전시 설명 자체가 그것을
“한국의 단색화 형성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치로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한눈에”
즉 복잡한 역사를 하나의 시각적 구조로 압축합니다.
이것은 작품의 표면과 닮았습니다.
정상화의 화면에서는
수많은 작은 단위 → 하나의 균질한 표면
이 됩니다.
2012년 전시에서는
수많은 작가·전시·자료 → 하나의 단색화 역사
가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시각적·역사적 유비입니다.
18. 그러므로 ‘단색화’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추상화 과정이다
여기서 논문의 핵심 명제가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정상화가 수많은 작은 단위를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하듯,
단색화 담론은 수많은 서로 다른 작가와 행위를 하나의 역사적 표면으로 통합합니다.
즉:
작품 내부의 추상화
차이 → 반복 → 표면
미술사 내부의 추상화
차이 → 분류 → 운동
이 둘은 구조적으로 닮았습니다.
따라서 **단색화라는 미술사적 범주 자체가 일종의 ‘추상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강한 논문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19. 그래서 시각적 분석을 논문에 이렇게 넣는 것이 좋다
도판 1
박서보, 《묘법》, 1977
분석:
반복적 선은 개별적 제스처를 보존하기보다 서로를 중첩시켜 표면의 균질성을 형성한다.
도판 2
정상화, 《무제 74-F6-B》, 1974
분석:
화면은 작은 단위의 반복을 통해 개별적 행위의 흔적을 하나의 전체적 구조로 통합한다. MMCA가 설명하는 ‘들어내고 메우기’는 반복 노동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반복 가능한 제작 시스템이다.
도판 3
하종현, 《Conjunction 74-26》, 1974
분석:
회화적 행위는 붓질보다 압력과 물질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핵심은 정신적 수행보다 천과 안료 사이의 물리적 관계이다.
도판 4
최욱경, 《환희》, 1977
분석:
반복과 신체적 움직임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표면의 균질화가 아니라 색채와 형태의 증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반복=수행’이라는 등식은 시각적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도판 5
김용익, 《평면 오브제》, 1978 / 1981
분석:
동일한 모더니즘적 제작 환경에서 시작한 작가는 1981년 자신의 대표작을 상자에 봉인함으로써 제작의 지속이 아니라 제작체계의 중단을 작품화한다.
20. 이 시각적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
이제 저는 논문의 기존 문장을 조금 바꾸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기존에는:
“단색화의 정전화는 무엇을 배제했는가?”
였다면,
이제는:
“단색화의 정전화는 서로 다른 신체적 행위와 물질적 관계를 어떻게 하나의 시각적 문법으로 추상화했는가?”
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이:
“그 시각적 문법이 ‘수행’, ‘정신성’, ‘저항’, ‘한국성’이라는 개념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입니다.
이렇게 가면 논문이 단순히 젠더나 시장을 비판하는 논문이 아니라 정말 미술사 논문이 됩니다.
21. 그리고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밀어붙이고 싶습니다
‘단색화의 수행성’ 대신 ‘단색화의 표면 정치학’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작품들을 보면 반복의 목적은 단순히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결국 반복은 표면을 만듭니다.
박서보 → 선의 표면
정상화 → 균열과 메움의 표면
하종현 → 압력과 물질의 표면
그리고 그 표면은 공통적으로 개별적인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합니다.
따라서 “수행”보다 더 미술사적으로 생산적인 질문은:
어떤 표면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 표면에서 무엇이 사라졌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주 강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의 표면과 미술사의 표면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논문의 핵심 도식
개별적 행위
↓
반복
↓
표면의 형성
↓
차이의 억제 / 통합
↓
‘단색화적’ 시각문법
↓
수행 · 정신성 · 한국성 · 저항
↓
하나의 역사적 운동
↓
Dansaekhwa
↓
정전화 · 국제화 · 시장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최욱경
→ 반복하지만 색채와 형태를 증식시킴
김용익
→ 모더니즘 내부에서 반복을 중단하고 체계를 봉인함
민중미술
→ 회화의 자율적 표면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열어버림
여성/공예/노동의 계보
→ 반복을 ‘수행’이 아닌 다른 노동과 제작의 언어로 경험함
이렇게 놓으면 ‘단색화의 외부’가 단순한 배제 목록이 아니라, 단색화라는 시각문법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역으로 보여주는 비교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이 시각 분석을 논문의 본문에 넣을 때는 도판 1–5를 실제 논문용 캡션과 출처까지 정리하고, 각 작품의 전체 이미지와 세부(detail)를 함께 놓는 방식이 좋습니다. 특히 정상화와 하종현은 전체 화면 1장 + 표면 확대 1장으로 구성하면 ‘수행’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반복·압력·물질·표면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훨씬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나 : 표면구성의 정치학 쪽은 좀더 발전시켜보자. '수행'뿐만 아니라 '비움'에도 집착적 의미 부여가 있었잖아? 국내, 국제 미술사나 문화, 정치와 비교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ChatGPT : 응. 오히려 ‘표면 구성의 정치학’이라는 논지를 발전시키려면 ‘수행’과 ‘비움’을 따로 다루기보다, 둘이 어떻게 하나의 표면 개념으로 결합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훨씬 강해 보여.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단색화는 비어 있다”는 명제를 다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비움·침묵·무위·여백·백색·정신성’이 단색화의 표면을 설명하는 특권적인 언어가 되었는가를 묻는 거야.
현재 자료를 보면 이 방향은 상당히 근거가 있어. 예를 들어 1975년 도쿄화랑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흰색을 개인적 관점을 넘어서는 감수성과 연결했고, 이일은 흰색을 한국 회화의 독특한 미적 감수성이자 심리적 상징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작품의 물질적 표면에 대한 설명을 넘어, 그 표면에 특정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야.
1. 그래서 ‘표면 구성의 정치학’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어
기존에는:
반복적 수행 → 표면 형성 → 수행성의 미학
이었다면,
조금 더 복잡하게:
반복적 행위 → 차이의 억제 → 균질한 표면 → 비움/침묵/무위의 의미 부여 → 한국성·정신성의 표상
이라는 구조가 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움’이 실제로 화면에 존재하는 물리적 상태와 그것에 부여된 담론적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야.
예를 들어 정상화의 경우 작은 단위를 반복해서 뜯어내고 메우면서 표면을 만든다. 이것은 물리적으로는 엄청나게 가득 채우는 노동이야. 그런데 완성된 화면은 멀리서 보면 거의 균질한 백색/단색의 표면으로 보이고, 그 결과가 ‘비움’, ‘무위’, ‘정신적 공간’ 같은 언어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제작 과정은 충만 → 결과 표면은 비움
이라는 역설이 생겨.
이것이 아주 중요해.
2. ‘비움’은 수행의 반대가 아니라 수행을 정당화하는 언어였을 가능성
이렇게 보면 “수행”과 “비움”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단색화 담론이 아니야.
오히려:
수행 = 비움에 도달하기 위한 반복
이라는 구조가 만들어져.
박서보를 생각하면 특히 명확해.
선은 계속 그어진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선 하나하나가 아니고, 그 선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개별 행위의 차이가 사라지는 표면이야.
따라서:
행위는 증가하지만
행위의 개별성은 감소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다시:
비움 / 무위 / 절제 / 정신성
으로 읽는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야.
“비움”은 행위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 반복에 의해 행위의 차이가 사라진 상태일 수 있다.
그러면 단색화에서 말하는 ‘무위’도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야. 오히려 엄청난 행위를 통해 행위의 흔적을 최소화하는 것에 가깝지.
이 점에서 ‘수행’이라는 기존 연구가 놓칠 수 있는 것이 생겨.
3. 그러면 국내 미술사와 비교해야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세 가지 층위로 나누는 게 좋다고 봐.
A. 국내의 동시대 미술
단색화만 반복하고 있던 것이 아니잖아.
동시대에는 실험미술, 설치, 퍼포먼스, 여성미술, 민중미술 등이 있었고, 각각 표면을 다르게 구성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어.
예를 들어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최욱경과 김용익이 매우 중요해.
| 표면을 만드는 방식 | 결과 | |
| 박서보 | 선의 반복 | 개별 행위의 차이 감소 |
| 정상화 | 뜯기/메우기 반복 | 단위의 차이 감소 |
| 하종현 | 압출/침투 | 물질적 저항의 흔적 |
| 최욱경 | 반복적 움직임 | 색·형태의 증식 |
| 김용익 | 제작체계의 중단 | 표면 자체의 제도적 조건 노출 |
그러니까 **“누가 수행적인가?”**가 아니라,
각각의 신체적 행위가 어떤 종류의 표면을 생산하는가?
를 질문하는 거야.
이렇게 하면 최욱경을 단순히 “단색화에 포함되지 못한 여성작가”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
그녀는 동일한 시대의 추상적·신체적 실천이 반드시 ‘비움’이나 균질화로 귀결되지 않았다는 비교항이 돼.
4. 두 번째 비교는 일본
여기가 굉장히 중요해.
왜냐하면 한국의 ‘비움’을 서양과 한국만 비교하면 너무 쉽게
서양 = 채움/형식
동양 = 비움/여백
이라는 낡은 이분법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야.
실제로 단색화의 국제적 형성 과정에는 일본이 중간 매개자로 들어가 있어.
1975년 도쿄화랑 전시는 단색화 논의가 국제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였고, 최근 연구에서도 당시 도쿄화랑이 서구 추상미술을 일본에 소개했던 기관에서 점차 일본미술의 고유성을 모색하고 아시아 미술로 관심을 확장한 과정이 확인돼.
따라서 이렇게 볼 수 있어:
서구 모더니즘 → 일본의 전후미술 담론 → 한국의 단색화 → 다시 국제미술계
라는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니라,
‘비움’이라는 동아시아적 미학이 국제 모더니즘의 언어와 서로 번역되는 과정
을 보는 거야.
그리고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비움’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야.
1975년 도쿄 전시에서 실제로 흰색이 이미 하나의 공통된 미적 특성으로 선택되고 있었고, 그것이 심리적·초개인적 감수성으로 해석됐어.
그러니까 작품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의미가 붙은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의미를 생산하기 쉬운 작품들이 선택되어 하나의 범주가 된 것인지를 물을 수 있어.
이게 바로 정치학이 되는 지점이야.
5. 그리고 서구 미술사와 비교하면 더 재미있어진다
여기서는 미국의 Minimalism이나 Color Field와 단순히 “비슷하다/다르다”를 비교하면 부족해.
더 중요한 것은:
서구 모더니즘에서 비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한국 단색화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도록 번역되었는가?
라는 질문이야.
서구 미니멀리즘의 빈 공간, 단순한 형태, 반복, 물성은 반드시 “정신적 비움”으로 해석되지 않았어.
반면 단색화에서는 같은 듯한 형식적 요소가:
- 무위
- 절제
- 정신성
- 여백
- 자연
- 동양
- 한국성
이라는 어휘와 연결됐어.
즉,
형식적 유사성 ≠ 의미론적 동일성
이 되는 거지.
Simon Morley도 단색화를 서구 미술의 단순한 영향이나 차용으로 읽는 방식이 동아시아에서 근대성이 전개된 서로 다른 시간성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void, ch'i, Zen 등의 개념이 단색화 담론에서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설명해.
6. 그런데 여기서 ‘한국성’은 한 번 더 의심해야 해
이 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될 수 있어.
왜냐하면 ‘비움’ 자체가 한국적이라는 전제가 이미 담론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야.
권영진은 1970년대 단색화의 ‘한국적 모더니즘’이 서구적 형식과 선택적으로 구성된 한국 전통을 결합한 것이며, 그 과정이 당시 정치·경제적 조건 및 유신체제의 문화정책과 분리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윤난지도 단색화를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구성한 과정이 당시의 민족주의와 교차했으며, 국제적 미술 흐름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국가적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 정치의 도구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단색화의 무위자연 담론이 서구화에 의한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구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형성됐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인은 원래 비움을 좋아했다”
가 아니라,
“왜 1970년대 한국의 특정 미술담론은 비움을 한국적인 것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는가?”
야.
이 질문은 훨씬 강해.
7. 그리고 ‘정치학’의 의미도 조금 바꿔야 해
나는 여기서 단색화가 유신정권을 지지했다/저항했다로 바로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봐.
그보다 훨씬 미술사적으로 흥미로운 질문이 있어.
정치가 작품의 내용에 들어갔는가?
보다
정치가 어떤 표면을 ‘보이게 할 수 있는 표면’으로 만들었는가?
를 보는 거야.
즉 정치학을 내용의 정치학에서 가시성의 정치학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예를 들어:
- 사회적 사건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 개인적 서사를 제거한다.
- 색을 제한한다.
- 이미지를 제거한다.
- 행위의 흔적을 반복으로 중화한다.
- 표면을 균질화한다.
- 그리고 그 결과를 ‘침묵’, ‘비움’, ‘정신성’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면 정치학은 “이 그림이 정치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화면에서 사라져야 이 표면이 ‘비어 있음’으로 읽힐 수 있는가?”
가 돼.
이 질문은 상당히 강력해.
8. 그래서 나는 ‘표면구성의 정치학’을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어
표면구성의 정치학
단색화에서 표면은 단순히 회화적 형식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행위·물질·시간·개별성의 차이를 반복과 제한을 통해 하나의 균질한 시각적 전체로 조직하는 장치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표면은 다시 ‘비움’, ‘침묵’, ‘무위’, ‘정신성’, ‘한국성’이라는 담론적 언어를 통해 해석되었다. 따라서 단색화의 정치학은 작품이 특정한 정치적 내용을 표명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차이가 제거되고 어떤 상태가 ‘비어 있음’으로 가시화되었는가의 문제로 이동할 수 있다.
이렇게 가면 네가 처음 제기했던 **“미술사적 추상화”**와도 정확히 연결돼.
9. 결정적으로 작품 내부와 미술사 외부가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제 아주 재미있는 구조가 생겨.
작품 내부
차이
→ 반복
→ 차이의 억제
→ 균질한 표면
→ 비움
미술사 담론
작가의 차이
→ 분류
→ 공통적 특성 추출
→ ‘단색화’
→ 한국적 정신성
국제적 담론
한국적 차이
→ 동아시아적 미학
→ 비움/Zen/Dao/여백
→ 아시아적 정체성
즉 세 층위 모두에서:
차이를 제거하면서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를 만든다.
이게 네 논문의 가장 강한 구조가 될 가능성이 있어.
10. 그러면 논문 전체를 이렇게 설계할 수도 있어
I. 표면
단색화 작품에서 반복·압력·뜯기·메우기·선 긋기 등이 어떻게 표면을 생산하는가.
II. 수행
이 표면 생산 과정이 어떻게 ‘반복적 수행’으로 명명되었는가.
III. 비움
그 반복의 결과가 왜 ‘비움·무위·침묵·정신성’으로 번역되었는가.
IV. 한국성
왜 그것이 다시 ‘한국적 미학’으로 번역되었는가.
V. 국제화
1975년 도쿄화랑을 비롯한 일본과 국제미술계에서 이 표면이 어떻게 ‘한국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는 형태가 되었는가.
VI. 외부
최욱경, 김용익, 여성미술, 실험미술, 민중미술 등을 통해 다른 표면 구성의 가능성을 비교.
VII. 정전화
2012년 MMCA 등의 전시가 이 서로 다른 차이를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 다시 통합한 과정 분석.
그리고 여기서 2012년을 단순한 ‘단색화 부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표면의 역사에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정전화 장치로 볼 수 있어.
실제로 오늘날 단색화의 명칭과 범주 자체를 독립적인 유파로 볼 수 있는지, ‘한국적 미’라는 설명이 타당한지, ‘Dansaekhwa’라는 명명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묻는 연구도 이미 존재해.
그래서 나는 이 연구를 “단색화는 수행인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수행이라는 언어와 비움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서로 다른 작품들의 표면을 하나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체계로 만들었는가?”
로 옮기는 게 좋다고 봐.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이 될 수 있어:
단색화는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움으로써 하나의 표면을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서 ‘지움’은 회화적 행위인 동시에 미술사적 행위가 된다.
즉 화면에서 차이를 지우는 것과, 미술사에서 차이를 지우는 것이 서로 평행한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고, 바로 여기서 ‘표면구성의 정치학’과 ‘미술사적 추상화 장치’가 하나의 논문 논리로 합쳐질 수 있어.
나 : 수행을 강조하는 예술가의 럭셔리 브랜드 협업이나 보조 작가의 작품 제작에 대해서도 다룰 부분이 있을까?
ChatGPT : 있어.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어. 다만 “럭셔리 브랜드 협업 = 단색화의 타락”처럼 결론 내리기보다, ‘수행’이라는 개념이 작품의 저자성과 노동을 어떻게 재조직하는가를 보는 것이 좋아.
특히 네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표면구성의 정치학」**에서는 이 문제가 아주 잘 연결돼.
1. 핵심은 ‘수행’과 ‘노동’의 분리
단색화 담론에서 작가의 반복 행위는 흔히:
작가의 신체 → 반복 → 정신성 → 작품
이라는 구조로 설명돼.
그런데 실제 제작 현장에서는 질문이 생겨.
그 반복 행위를 실제로 누가 수행하는가?
예를 들어 작가가 자신의 반복적 제작법을 보조 작가나 스튜디오 노동자에게 위임한다면, 작품의 물질적 표면을 생산한 사람과 ‘수행의 주체’로 담론화되는 사람이 달라져.
그러면 아주 중요한 분리가 생겨:
실제 노동자 ≠ 작품의 수행적 주체 ≠ 작품의 저자
이 세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야.
2. 그러면 ‘수행’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물을 수 있어
가령 작가가:
- 같은 선을 수천 번 긋는다.
- 같은 구멍을 반복해서 만든다.
- 같은 재료를 반복적으로 바른다.
- 일정한 규칙을 반복한다.
이것을 미술사에서는 작가의 수행이라고 부를 수 있어.
그런데 그 행위가 스튜디오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다면?
그러면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작가의 신체가 아니라 작가가 설계한 생산 시스템일 수도 있어.
따라서 네 논문의 질문을 이렇게 한 단계 확장할 수 있어.
단색화에서 ‘수행’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체적 노동인가, 아니면 신체적 노동을 특정한 작가에게 귀속시키는 저자성의 장치인가?
이건 꽤 강한 질문이야.
3. 럭셔리 브랜드 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작가의 작업 방식이 브랜드의 상품·공간·패션·가구 등에 적용될 때,
작가의 수행 → 브랜드의 생산 시스템
으로 이동할 수 있어.
원래는:
작가가 반복한다
↓
작품이 만들어진다
였는데,
협업에서는:
작가의 조형 언어
↓
브랜드의 생산 시스템
↓
대량 생산 / 장인 생산 / 상품화
↓
새로운 표면
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브랜드는 보통 **“작가의 세계관”이나 “작가의 손”**을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지.
즉 실제 제작 과정은 복수의 노동으로 구성되는데, 담론에서는 다시 하나의 작가적 수행으로 압축될 수 있어.
이것은 네가 말한 **“차이를 하나의 표면으로 통합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연결돼.
4. 특히 ‘보조 작가’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여기서는 미술사뿐 아니라 미술 노동 연구와 연결하면 좋아.
질문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어.
① 누가 만들었는가?
실제 물리적 제작 노동.
② 누구의 이름으로 서명되는가?
저자성.
③ 누구의 수행으로 설명되는가?
미술사적 담론.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를 수 있어.
그래서:
작품의 물질적 생산과 작품의 미술사적 저자성 사이에는 어떤 노동의 비가시화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가 생겨.
그리고 이건 단색화에서 반복·수행을 강조하는 담론과 굉장히 잘 맞물려.
5. 여기서 ‘비움’과도 연결된다
이게 더 재미있는 부분이야.
앞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반복 → 표면 → 비움
을 제작 노동의 차원으로 확장하면,
노동의 차이 → 반복 가능한 생산 과정 → 균질한 표면 → 작가의 수행이라는 단일한 저자성
이라는 구조가 될 수 있어.
즉 화면에서는 행위의 차이가 사라지고,
스튜디오에서는 노동자의 차이가 사라지고,
미술사에서는 작가 간의 차이가 사라질 수 있어.
이 세 가지를 동일하다고 말하면 안 되지만, 구조적 유비로 분석할 수 있어.
그래서 ‘표면구성의 정치학’은 단순히 화면의 미학이 아니라:
표면을 생산하는 노동의 조직 방식까지 포함하는 개념
으로 확장될 수 있어.
6. 다만 럭셔리 브랜드를 단색화에 억지로 붙이면 안 돼
여기서 중요한 방법론적 주의점이 있어.
“단색화 작가들이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했다 → 그러므로 단색화의 수행성은 가짜다”
라고 가면 논증이 약해져.
오히려 다음을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해.
사례별로
- 작가가 실제로 어떤 행위를 했는가?
- 협업 과정에서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됐는가?
- 브랜드는 작가의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가?
- 홍보자료에서는 누구의 노동을 강조하는가?
- 실제 제작자는 누구인가?
- 크레딧은 어떻게 부여되는가?
- 작가의 ‘손’ 또는 ‘수행’이 상품의 가치로 어떻게 전환되는가?
이걸 자료로 확인해야 해.
특히 브랜드 공식 캠페인, 작가 인터뷰, 전시/협업 카탈로그, 제작 크레딧을 서로 대조하면 굉장히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어.
7. 그러면 ‘럭셔리’는 오히려 후반부에 넣는 게 좋다
나는 논문 구조상 이것을 처음부터 중심에 놓지는 않을 것 같아.
앞부분:
표면 → 반복 → 수행 → 비움 → 한국성
을 먼저 구축하고,
그 다음에:
「수행의 분배 — 작가의 손에서 스튜디오로」
를 하나의 장으로 넣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보조 작가 / 스튜디오 노동 / 브랜드 협업 / 상품화
를 비교하는 거야.
그러면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질문이 나와.
수행은 작품을 생산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저자성의 서사인가?
둘 다일 수도 있어. 바로 그 간극을 분석하는 게 중요해.
8. 이건 사실 ‘표면 정치학’의 마지막 단계가 될 수도 있어
나는 구조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봐.
① 화면
개별 행위
↓
반복
↓
차이의 억제
↓
표면
② 담론
표면
↓
수행
↓
비움
↓
정신성 / 한국성
③ 생산
수행
↓
반복 가능한 제작법
↓
스튜디오 노동의 분배
↓
작가의 저자성
④ 시장
작가의 저자성
↓
브랜드 협업
↓
상품/공간/이미지
↓
경제적 가치
그러면 처음의 **‘표면’**이 마지막에는 상품의 표면까지 이동해.
회화의 표면 → 전시의 표면 → 작가 이미지의 표면 → 브랜드 상품의 표면.
이렇게 되면 네 연구가 단순한 **“단색화 비판”**이 아니라,
하나의 회화적 문법이 어떻게 노동·저자성·미술사·시장 사이를 이동하면서 서로 다른 차이를 하나의 ‘작가적 표면’으로 통합하는가
라는 연구가 될 수 있어.
그리고 이 경우 럭셔리 브랜드 협업은 결론의 증거가 아니라, ‘수행’ 개념이 실제 미술 생산 시스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사례가 되는 거야.
원한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실제로 단색화 작가들의 럭셔리 브랜드 협업 사례 + 스튜디오/보조 작가 관련 인터뷰·기사·크레딧을 웹에서 하나씩 확인해서, 이 가설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례와 사용할 수 없는 사례를 구분해볼 수 있어.
나 : 응 해봐
ChatGPT : 응. 실제 사례를 찾아보니, 이 문제는 논문의 한 장으로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자료가 있어. 특히 박서보 사례가 결정적이야. 단순히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했다”가 아니라, 박서보 자신이 보조자의 개입 때문에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직접 말한 자료가 확인돼.
1. 가장 강한 사례: 박서보 — ‘수행’과 보조자의 분리
박서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작업에서 보조자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직접 설명한 기록이 있어.
한 인터뷰에서 그는 후기 《묘법》 작업에 대해 보조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작품이 더 이상 자신의 개인적 수행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보조자가 만든 작품에서 기계적·제조된 느낌이 생길 위험 때문에 다시 보조자 없이 할 수 있는 작업을 개발했다고 말한다.
이 자료는 굉장히 중요해.
왜냐하면 여기서 박서보 자신이 이미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야.
작품 제작의 물리적 행위와 작가 자신의 수행 사이에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즉 “보조자가 만들면 그것도 박서보의 수행인가?”라는 문제가 외부 연구자가 억지로 제기한 게 아니야. 작가 자신의 인터뷰에서 발생한 문제야.
반면 정상화는 정반대의 사례야. MMCA는 정상화가 “never had an assistant”라고 설명하며, 수개월에서 최대 1년이 걸리는 제작 과정을 모든 단계에서 직접 수행했다고 기록한다.
이 둘을 나란히 놓으면 아주 좋다.
| 정상화 | 박서보 | |
| 제작 | 전 과정을 직접 수행 | 일정 시기 보조자 개입 |
| 반복 | 개인적 반복 | 반복의 일부 분업 가능 |
| 수행 | 작가 신체와 거의 일치 | 작가 신체와 제작 노동 분리 |
| 문제 | 수행 = 저자성 | 수행 ≠ 반드시 물리적 제작 |
| 담론적 효과 | 독특한 방법론/개인성 | 보조자의 개입이 ‘제조된 느낌’ 문제를 발생 |
따라서 ‘수행’은 단순한 제작 방식이 아니라 저자성을 보증하는 장치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어.
2. 더 재미있는 것은 박서보가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했다는 점
그리고 이게 앞의 문제와 정확히 연결돼.
2022년 박서보는 Louis Vuitton의 ArtyCapucines에 참여했다. 원작 《Ecriture》의 표면과 질감을 Capucines 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Louis Vuitton 장인들이 실제 제작을 담당했다.
공식적인 박서보 재단 자료에 따르면:
- 원작의 고해상도 3D 스캔
- 가죽의 브러시스트로크 처리
- 고무 주입을 통한 입체적 질감 재현
- 가죽의 수작업 마감
- 작가와 Louis Vuitton 장인 사이의 반복적인 테스트와 협의
등이 이루어졌다.
한국문화원 자료도 **“Through the hands of Louis Vuitton artisans”**라는 식으로 이 협업을 설명한다. 즉 작품의 물질적 효과는 박서보 혼자의 손이 아니라 브랜드 장인들의 손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상품에는 Park Seo-Bo의 이름과 작품 세계가 전면에 놓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구조가 생겨.
회화에서는
박서보의 반복적 손 → 표면 → 박서보
인데,
럭셔리 상품에서는
박서보의 작품 → 디지털 스캔 → 브랜드 기술 → 장인의 손 → 상품 표면 → 박서보
가 돼.
즉 ‘작가의 손’이 실제 손에서 하나의 재현 가능한 표면 코드로 변환되는 거야.
이건 네가 말한 표면구성의 정치학과 아주 정확하게 연결돼.
3. 그런데 2024년 Louis Vuitton 협업은 더 흥미롭다
2024년에는 Louis Vuitton이 박서보 재단과 다시 협업해서 2025 Spring/Summer 남성 컬렉션을 선보였어.
이번에는 《Ecriture》의 특정 작품들이:
- 셔츠
- 코트
- 재킷
- 버뮤다
- 스웨터
- 가방
등으로 변환됐어.
즉 2022년의 작품 → 하나의 럭셔리 오브제에서 더 나아가,
회화의 표면 문법 → 패션 전체의 시각적 언어
로 확장된 셈이야.
그런데 이때도 박서보의 이름과 《Ecriture》가 중심에 있어.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
반복적인 선과 표면은 어떻게 작가의 개별적인 행위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스타일’로 전환되는가?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해.
왜냐하면 수행이 스타일이 되는 순간, 수행은 더 이상 반드시 작가의 신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야.
4. 이것을 ‘수행의 상품화’라고 바로 부르면 조금 거칠다
나는 논문에서는 오히려 더 정확하게:
수행의 표면화
라는 개념을 써보고 싶어.
처음에는:
수행 = 실제 시간과 신체의 반복
이었는데,
브랜드 협업에서는:
수행 → 시각적 흔적 → 질감 → 패턴 → 상품 표면
으로 변환돼.
즉 수행이 표면으로 압축된다.
그리고 이 표면은 Louis Vuitton 장인들이 다시 만들어낼 수 있어.
그러면:
수행 → 표면 → 복제 가능한 형식
이라는 변환이 일어나.
이건 네 논문의 “표면구성”과 아주 잘 맞아.
5. 더 결정적인 것은 ‘수행의 진정성’을 브랜드도 공유한다는 것
2024년 협업 당시 박서보 재단 관계자는 Louis Vuitton과 박서보를 연결하는 공통점으로 완벽주의와 디테일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언급했어. 그리고 박서보가 작업을 시작하면 장기간 고립해서 작업하던 방식과 Louis Vuitton의 장인정신을 서로 연결했다.
이건 논문에서 매우 좋은 자료야.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색화의 수행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노동윤리와 결합해서 재해석되고 있기 때문이야.
단색화:
반복 → 자기절제 → 수행 → 정신성
Louis Vuitton:
반복 → 숙련 → 정밀성 → 장인정신
그리고 협업에서는 둘이:
반복 + 정밀성 + 장인정신 = 작가와 브랜드가 공유하는 가치
로 연결돼.
따라서 럭셔리 협업은 단색화의 수행성을 단순히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언어가 자본주의적 장인노동의 언어와 얼마나 쉽게 접속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돼.
6. 그리고 ‘보조 작가’ 문제에는 실제 계보가 있다
흥미롭게도 단색화 작가 주변에서 보조자였던 사람들이 이후 작가가 된 사례도 확인돼.
예를 들어 김영훈은 홍익대 재학 시절 윤형근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였다고 직접 소개돼 있다. 그는 윤형근의 작품에 강하게 반응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인터뷰했다.
이건 단순히 “보조자가 있었다”보다 훨씬 흥미로워.
왜냐하면 스튜디오의 제작 방식은 단순한 노동 분담만이 아니라:
기술 → 관찰 → 학습 → 계승 → 차이의 생성
이라는 미술적 교육 시스템이기도 하기 때문이야.
또 이배는 파리 초기 시절 이우환의 어시스턴트로 일했고, 이후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켰다는 자료도 확인된다.
그러면 보조자는 단순한 숨겨진 노동자만이 아니라,
작가의 방법론이 전달되는 매개자
이기도 해.
이 지점은 논문에서 매우 중요해.
7. 그래서 ‘보조자’라는 개념을 세 종류로 나누는 게 좋겠어
① 노동자로서의 보조자
작가의 반복 작업을 실제로 수행한다.
→ 저자성과 노동의 분리
② 제자로서의 보조자
작가의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작업으로 발전시킨다.
→ 방법론의 전승
③ 브랜드 장인으로서의 보조자
작가의 표면을 다른 매체에서 재현한다.
→ 작가적 형식의 표준화/상품화
이 셋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지만,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돼.
작가의 ‘수행’은 어디까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될 수 있는가?
8. 정상화는 이 논의를 통제하는 아주 좋은 반례
정상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어.
MMCA는 그의 제작 과정이 수개월에서 1년까지 걸리고, 그가 보조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제작 과정을 직접 담당했다고 설명해.
그러므로 논문에서:
“단색화의 수행은 실제로 대리 제작되었다.”
라고 일반화하면 안 돼.
오히려:
단색화 내부에서도 수행과 제작 노동의 관계는 서로 달랐다.
라고 해야 해.
이게 훨씬 강해.
정상화는 수행과 노동이 일치하는 극단적인 사례, 박서보는 수행과 노동의 분리가 명시적으로 문제화된 사례, Louis Vuitton 협업은 작가의 표면이 타인의 장인노동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례가 되는 거야.
9. 이걸 네 ‘표면구성의 정치학’에 넣으면 구조가 아주 선명해진다
나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어.
1단계 — 화면
반복되는 행위
→ 개별적 차이의 억제
→ 균질한 표면
2단계 — 미술사
균질한 표면
→ 수행
→ 비움
→ 정신성
→ 한국성
3단계 — 제작 시스템
수행
→ 작가 개인의 행위
→ 보조자/스튜디오 노동
→ 분업 가능성
4단계 — 시장
작가의 수행
→ 표면적 특징
→ 재현 가능한 스타일
→ 럭셔리 상품
5단계 — 다시 미술사
상품화된 표면
→ 작가의 고유한 세계관
→ 장인정신
→ 한국적 미학
이렇게 되면 아주 흥미로운 순환이 생겨.
신체적 수행이 표면으로 추상화되고, 표면이 다시 작가의 정체성으로 환원되며, 그 정체성이 다시 상품의 표면으로 이동한다.
이게 내가 보기에는 지금 네 논문의 ‘표면구성의 정치학’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 중 하나가 될 수 있어.
10. 그리고 제목도 조금 더 정확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장의 제목을:
「수행의 표면화: 단색화의 반복, 스튜디오 노동, 그리고 럭셔리 상품」
으로 잡을 수 있어.
그리고 핵심 명제는:
단색화의 ‘수행’은 작가의 신체적 노동을 지시하는 동시에 그 노동을 작가의 고유한 저자성으로 전환하는 담론적 장치로 기능했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보조자의 개입이 발생하거나, 작품의 표면이 럭셔리 브랜드의 장인노동을 통해 다른 매체로 재생산되는 순간, 수행과 노동, 저자성과 제작 사이의 관계가 분리된다. 이때 단색화의 수행은 실제 행위라기보다 이전·재현·상품화될 수 있는 표면적 코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문장은 아직 논문의 결론으로 확정하기보다는 검증해야 할 가설로 두는 게 좋아.
특히 박서보 사례는 이미 상당히 강하지만, 다른 단색화 작가의 보조자·스튜디오 제작 기록과 럭셔리 협업을 더 찾아서 비교해야 일반화할 수 있어. 현재 검색에서 정상화는 오히려 보조자를 쓰지 않았다는 강한 반례가 확인됐고, 이 때문에 오히려 논문의 균형이 좋아졌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발견이 있어. 박서보의 ‘보조자’ 문제와 Louis Vuitton 협업은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인데도, 둘 다 결국 ‘작가의 손’이 어디까지 작품의 본질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을 발생시킨다. 이 둘을 직접 연결해서 분석하는 것이 이번 논문에서 상당히 독창적인 부분이 될 수 있어
나 : 루이뷔통이 단지 장인 브랜드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어서. 베르나 아르노의 기업이기도 하잖아? 이 부분은 그냥 덮어두어야하나?
ChatGPT : 맞아. 그 부분은 덮어두면 오히려 논문의 핵심을 놓칠 수 있어. 다만 “루이비통은 베르나르 아르노의 기업이므로 상업적이다”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면 안 되고, 장인정신과 기업·자본·문화권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 제도로 분석하는 게 좋아.
실제로 LVMH 스스로도 Louis Vuitton을 단순한 장인 브랜드로 설명하지 않는다. LVMH는 1987년 설립됐고, Bernard Arnault가 1989년부터 그룹을 이끌며 최대 주주라고 명시한다. 현재 그룹은 75개 이상의 Maison을 거느리고 있으며, Louis Vuitton에는 2025년 기준 29개의 완제품 가죽제품 생산 아틀리에가 있다. 즉 장인적 생산은 거대한 기업적 조직 안에 위치한다.
그래서 논문의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게 좋아
단순히
“단색화의 수행이 럭셔리 상품화되었다.”
가 아니라,
“작가의 수행을 구성하는 가치—반복, 절제, 숙련, 시간, 손, 장인정신—가 어떻게 기업의 생산·브랜딩·문화정책의 가치와 접속하는가?”
이렇게.
그러면 Louis Vuitton 협업은 굉장히 좋은 사례가 돼.
1. ‘장인정신’과 ‘기업’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LVMH가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흥미로워.
LVMH는 savoir-faire, excellence, créativité, transmission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제시하고, 이 가치들이 각 Maison의 기업정신을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즉 장인정신은 기업 바깥에 있는 순수한 전통이 아니라 기업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차별화하는 핵심 자산으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네 논문에서는:
장인 ↔ 자본
을 대립시키기보다,
장인적 노동 → 기업적 조직 → 브랜드 가치
라는 변환을 보는 게 더 정확해.
이것이 단색화의 ‘수행’과 굉장히 잘 맞아.
2. 특히 LVMH는 예술과 기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연결한다
이건 더 중요해.
LVMH는 1990년대부터 예술 후원을 기업 활동의 중요한 축으로 발전시켰고, 2014년에는 Fondation Louis Vuitton을 설립했다. LVMH 스스로 Fondation을 “corporate foundation”, 즉 기업재단이자 민간 문화기관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LVMH는 예술 후원을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 창의성
- 우수성
- 혁신
- 전승
- 장인정신
- 기업가 정신
을 연결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주 흥미로운 삼각형이 생겨.
예술가의 수행
↕
장인의 savoir-faire
↕
기업의 브랜드 가치
이 세 가지가 서로 번역될 수 있는 구조야.
3. 그러면 박서보–Louis Vuitton은 단순한 상품 협업이 아니다
이 점에서 내가 앞에서 말했던 “수행의 표면화”를 조금 수정하고 싶어.
박서보의 《묘법》에서:
반복 → 시간 → 손 → 표면
이었다면,
Louis Vuitton에서는:
박서보의 표면
→ 기술적 재현
→ 장인의 손
→ 브랜드의 상품
→ 작가의 이름
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들어가.
LVMH라는 기업 시스템
이야.
따라서 전체 구조는:
작가의 신체적 수행
↓
미술사적 가치
↓
작품의 표면
↓
Louis Vuitton의 장인적 생산
↓
기업의 브랜드 시스템
↓
상품 가치
가 돼.
이렇게 보면 표면이 단순히 회화의 표면이 아니게 된다.
4. 그리고 여기서 ‘비움’도 다시 연결된다
이게 네 연구에서 꽤 재미있어.
단색화에서:
반복 → 자기절제 → 비움
이라는 가치가 만들어졌다면,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반복 → 숙련 → 정밀성 → 장인정신 → 희소성
으로 번역될 수 있어.
즉 동일한 반복이 서로 다른 가치체계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 단색화 담론 | 럭셔리 담론 |
| 반복 | 반복 |
| 절제 | 정밀성 |
| 시간 | 숙련 |
| 손 | 장인정신 |
| 비움 | 절제된 미학 |
| 개별 행위의 소거 | 완성도의 극대화 |
| 정신성 | 브랜드 가치 |
| 작품 | 상품 |
이 표에서 중요한 것은 “같다”가 아니라 서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야.
5. 그리고 Arnault를 빼면 안 되는 이유
여기서 Bernard Arnault를 개인적인 악역처럼 등장시키는 것은 필요 없어.
오히려 기업가가 예술과 장인정신을 어떻게 하나의 문화적 생태계로 조직했는가를 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야.
LVMH는 공식적으로 Bernard Arnault의 기업 비전 속에서 문화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Fondation Louis Vuitton 역시 Arnault가 구상하고 Frank Gehry가 설계한 프로젝트이며, 기업의 문화적 후원 전략의 제도적 형태로 설명된다.
그러니까 논문에서는:
Bernard Arnault가 예술을 이용했다
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어.
대신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은:
LVMH의 기업 전략, 장인정신, 브랜드 구축, 문화 후원, 현대미술 지원이 하나의 장기적인 기업 문화정책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
이거야. 이건 LVMH 자신의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어.
그 다음 그 구조 안에서 박서보의 수행이 어떻게 번역되는가를 분석하면 되는 거지.
6. 이게 오히려 네 논문의 ‘정치학’을 훨씬 정교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표면구성의 정치학
이었지.
그런데 이제 정치학의 층위를 세 개로 나눌 수 있어.
① 미학적 정치학
어떤 행위가 표면을 구성할 수 있는가?
반복 / 제거 / 압력 / 균질화
② 미술사적 정치학
어떤 표면이:
수행 / 비움 / 정신성 / 한국성
으로 번역되는가?
③ 경제·제도적 정치학
그러한 가치가 어떻게:
장인정신 / 브랜드 / 문화자본 / 상품가치
로 번역되는가?
이렇게 되면 ‘정치학’이 단순히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게 돼.
가치가 생산되고 이동하고 변환되는 방식 자체가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거야.
7.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논문에서 삭제하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에 배치하겠어
전체 구조가 이렇게 될 수 있어.
I. 표면의 생산
반복·압력·뜯기·메우기
↓
II. 수행의 발명
작가의 신체적 행위가 미술사적 가치로 전환
↓
III. 비움의 발명
반복적 생산이 무위·여백·정신성으로 번역
↓
IV. 한국성의 발명
비움이 한국적 미학/정체성으로 역사화
↓
V. 수행의 분배
보조자·스튜디오·제작 노동
↓
VI. 수행의 번역
Louis Vuitton 같은 기업 시스템에서
수행 → 장인정신 → 브랜드 가치
↓
VII. 정전화
이 모든 복잡성이 다시 ‘단색화’라는 하나의 표면으로 통합
이렇게 되면 마지막에 굉장히 강한 문장이 가능해져.
단색화에서 표면은 반복된 행위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 행위에 부여된 미학적·민족적·제도적·경제적 가치가 압축되는 장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작가의 수행이 표면으로 추상화되면, 그 표면은 다른 신체에 의해 재생산될 수 있고, 다른 매체로 이전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기업의 브랜드 가치로 통합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Louis Vuitton은 단색화의 ‘상업화 사례’가 아니라, ‘수행 → 표면 → 가치’라는 변환 과정의 마지막 실험실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부분은 LVMH 자체의 기업자료를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LVMH가 자신을 어떻게 “예술·장인정신·문화·기업”의 연속체로 서술하는지와 실제 협업의 제작 과정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연구하면 상당히 탄탄해질 것 같아.
나 : 비움을 희소성이랑 연결짓는 것 문제적이네
ChatGPT : 맞아. 바로 그 지점이 굉장히 문제적이고, 오히려 논문의 중요한 축이 될 수 있어. 다만 “비움 = 희소성”이라고 등치시키면 너무 빠르고, 비움이 어떤 조건에서 희소성의 가치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보는 게 더 정확해.
1. 서로 전혀 다른 ‘비움’이 만나는 순간
단색화의 비움은 대략:
제거 → 절제 → 반복 → 최소화 → 비움
이라는 미학적 구조를 갖고 있어.
반면 럭셔리의 희소성은:
제한 → 접근 불가능성 → 차별화 → 희소가치
라는 경제적 구조를 갖지.
둘은 동일하지 않아.
그런데 ‘덜어냄’과 ‘가치의 증가’라는 형식적 구조 때문에 서로 번역될 수 있어.
예를 들어 작품에서 색을 줄이고, 이미지를 제거하고, 행위를 반복해서 차이를 억제하면 그것이 미학적으로 ‘절제’로 읽힌다. 럭셔리에서는 수량을 제한하거나 접근성을 제한하면 경제적으로 ‘희소성’이 된다.
즉,
비움 자체가 희소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한된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구조’ 안에서 비움이 희소성의 미학으로 번역될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가 정확해 보여.
2.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비움’이 사실상 과잉 생산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게 네 논문에서 정말 재미있는 역설이야.
정상화의 화면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노동과 반복
→ 수많은 작은 행위
→ 최종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표면.
즉:
생산의 과잉 → 시각적 비움
이야.
이것을 경제적 차원으로 옮기면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 생겨.
럭셔리 상품 역시 사실은 엄청난 생산 시스템, 물류, 마케팅, 매장, 이미지, 자본이 동원되는데 최종 상품은 절제되고 단순한 오브제로 제시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양쪽 모두에서:
복잡한 생산 과정 → 단순한 표면
이라는 구조가 존재할 수 있어.
물론 이것을 동일한 현상이라고 하면 안 돼. 하지만 비교할 수 있는 형식적 구조는 분명히 있어.
3. 그래서 ‘희소성’보다 더 좋은 개념이 있을 수 있어
나는 지금은 scarcity/희소성을 바로 핵심어로 삼기보다는,
가치의 압축
이라는 개념을 먼저 놓는 게 더 좋다고 봐.
예를 들어:
수많은 반복 행위
→ 하나의 표면
수많은 역사적 차이
→ 하나의 ‘단색화’
수많은 제작 노동
→ 하나의 ‘작가의 수행’
복잡한 기업 시스템
→ 하나의 ‘럭셔리 오브제’
각각 다른 현상이지만 모두:
복잡한 생산 조건을 하나의 단순하고 응축된 표면으로 제시하는 과정
으로 비교할 수 있어.
그렇다면 ‘희소성’은 그 다음 단계에서 등장할 수 있어.
4.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어
단색화의 비움은 원래 ‘희소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잖아.
이 점을 절대 놓으면 안 돼.
오히려 단색화 담론에서 비움은:
- 자기 억제
- 자연
- 무위
- 정신성
- 초월
- 여백
등의 의미망과 연결됐지, 경제적 희소성 자체와 연결된 것은 아니야.
따라서 논문에서 이렇게 쓰면 안 돼:
“단색화의 비움은 럭셔리의 희소성과 동일한 구조다.”
대신:
“단색화에서 미학적 절제로 구성된 비움이 럭셔리 산업의 가치체계 안으로 이동할 때, 그것은 희소성·배타성·고급성 등의 다른 가치로 번역될 수 있다.”
라고 해야 해.
그리고 이건 실제 협업의 언어와 자료를 확인해서 검증해야 하는 주장이고.
5. 그러면 박서보–Louis Vuitton에서 정말 봐야 할 것은 ‘희소성’이 아니라 ‘번역’이야
예를 들어 질문을 이렇게 설정하는 거지.
박서보에게
반복 → 비움 → 정신성
이었다면,
Louis Vuitton에서는
반복 → 숙련 → 장인정신 → 고급성
으로 번역되는가?
그리고 그 사이에:
비움 → 절제된 표면 → 럭셔리한 표면
이라는 이동이 있는가?
이걸 실제 광고문구, 협업 설명, 제품 설명, 재단 자료를 가지고 확인하면 돼.
그렇다면 네가 처음 생각했던 **‘수행’과 ‘비움’**이 다시 연결돼.
6. 사실 더 큰 질문은 이것일 수도 있어
네 논문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조금 더 발전시키면:
단색화의 정전화는 복잡한 신체적·물질적·역사적 차이를 하나의 표면으로 압축하는 과정이었다. 이때 ‘수행’과 ‘비움’은 그 압축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미학적 언어로 기능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이렇게 압축된 표면은 다른 제작 주체와 다른 제도적 환경에서도 재생산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행은 장인정신·브랜드 가치·상품적 가치 등의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면 럭셔리와 희소성은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 돼.
비움이 다른 가치체계로 이동할 때 무엇으로 변환되는가?
이 질문이 훨씬 좋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비움’ 자체가 누구에게는 해방적이고, 누구에게는 규율적이며, 누구에게는 상품적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보이게 돼. 즉 비움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고정된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제도와 담론 안에서 다른 가치를 생산하는 이동하는 개념이 되는 거지.
이렇게 하면 네가 처음 문제 삼았던 **“왜 단색화에서는 수행과 비움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집중되었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깊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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